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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여 Sep 01. 2023

중년소년의 잠깐 트레블로그

15. Leon - Astroga

순례길 DAY 22. Leon - Villard de Mazarife 

다시 순례자의 일상으로 복귀했다. 이날은 21km 정도만 걸으면 되는 거리라서 느긋하고 여유 있게 걸었다. 그동안 주로 내 뒤를 걸었던 페페는 짐을 미리 숙소로 보내는 동키 서비스 덕분에 한결 가벼운 발걸음으로 앞서나갔다. 조금 부럽긴 했지만 스스로에게 내 짐을 누군가에게 맡기지 않겠다고 한 약속을 어길 순 없었다. 순례길을 걷기 전에는 21km라면 걷기에는 멀다라고 생각했겠지만 이제 이 정도 거리는 그다지 힘들지 않게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체력이 좋아졌다. 다리 근육도 그렇고 폐활량도 한층 좋아진 것이 확실히 느껴진다. 이젠 가파른 오르막이 아니면 숨이 차지도 않고 그다지 힘들지도 않다. 몸무게와 뱃살이 점점 줄어가고 있었다. 순례길 동안 10kg 그램 정도 감량하는 게 목표였는데 체감상으로 멀지 않은 느낌이었다. 

항상 웃으시던 노르웨이 부부, 무릎 때문에 고생하셨는데 무사히 순례길 잘 마치셨길.

도심을 벗어나 들판으로 나오니 제주에서 익숙하게 봐온 풍경과 봄냄새가 문득문득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다. 문득 제주의 바다냄새가 그리워졌다. 내가 제주에서 지내온 7년의 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지 그리고 내가 제주를 얼마나 사랑하게 되었는지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날 우리는 레온가 아스트로가 사이를 지나는 두 개의 다른 코스 중 신규 루트라고 할 수 있는 길을 선택해서 걸었다. 원래의 순례길에 비해 국도와 산업지역에서 벗어나 경작지와 한적한 들판을 걷는 길이였기 때문이다. 무탈하게 도착한 숙소의 이름은 'Albergue de Jesus'라는 사립알베르게였다. 이 알베르게는 들어서는 입구부터 맘에 들었다. 널따란 잔디밭에 순례자들이 옹기종기 함께 쉴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이 안락했고 내부시설도 훌륭했다. 샤워와 빨래를 마치고 먼저 도착한 페페와 함께 맥주 한 캔을 들고 정원에 앉아 담배도 피우며 책을 읽었다. 의자에 앉아 멀리 평원을 바라보며 맥주를 홀짝이다 갑자기 벅찬 행복을 느꼈다. 따듯한 햇살에 스치는 봄바람을 맞으며 이렇게나 한가롭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니 갑자기 이 모든 것이 믿을 수 없는 행운처럼 느껴졌다. 난 이 이상 더 바랄 게 없었다. 나의 몸과 마음은 그 어떤 것도 더 요구할 수 없을 만큼 그저 안정되어 있었다. 순례길을 떠나기 전의 결심들과 그동안의 여정, 그리고 나의 삶이 스쳐지나갔다. '감사한 삶이로구나.' 순례길을 떠나기 전에 느꼈던 막연함과 두려움이 오늘 아주 강력한 확신으로 응답되었던 순간이었다. 나는 순례길을 정말로 사랑하게 되었구나. 그리고 내 인생을 좀 더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생겼다.

Albergue De Jusus와 페페

순례길 DAY 23. Villard de Mazarife - Astroga

한국나이로 내 나이는 마흔셋. 요즘 여든까지 사는것이 흔한일에 된 세상에서 인생의 중반부를 지나고 있는 시점에 이르렀다. 몇차례의 심각했던 좌절을 지나 예전에 생각했던 나의 인생과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나. 스콧 피츠제랄드가 쓴 자전에세이 <무너져내리다, The Cracked - Up>의 한 문단에서 발견 할 수 있었던 나의 모습이 이날 떠올랐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에는 인생은 거의 개인적인 문제였다. 나는 노력이 쓸모없다는 자각과 그럼에도 분투해야 한다는 자각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해야만 했다. 바꿔말하면, 실패를 피할 수 없다는 확신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해야 한다는 결단 사이의 모순이라고 하는편이 더 정확하겠다. 내가 평범한 어려움들, 예컨대 가족문제, 일문제, 개인적인 문제를 이겨내고 이 일을 해낼 수 있다면 나의 자아는 오직 중력만이 마지막 순간에 지상으로 끌어내릴 수 있을만큼 힘차게 쏘아올린 화살처럼 무에서 무를 향해 계속해서 날아갈 것이다. 나는 하루하루를 그렇게 보냈다. 새로운 일거리는 오직 내일의 밝은 전망만을 의미했다. 나는 열심히 살고 있기도 했지만 늘 “마흔 아홉 살 까지는 괜찮을거야.” 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마흔아홉살이 되기 10년 전에 나는 문득 내가 이미 망가져 있었음을 깨달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금이 간 사기그릇을 옮기듯 나 자신을 조심스럽게 들고 문 밖으로 걸어 나가서 쓰라린 고통의 세계 속으로 사라지는 것 뿐이었다. 내 앞에 놓인 것은 내가 사십대가 되었을 때 받으려고 주문해 두었던 요리가 아니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삶은 내가 뜻하던 대로 흘러가지 않았고 어느새 나도 내가 누군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 그 순간이 혼란스러웠다. 최선은 아니지만 나름 내 선택에 책임을 지는 삶을 살았다고 생각 하지만 후회가 남고 부끄러운 순간이 너무 많다. 이 여행을 통해 내가 바랬던 것은 나머지 절반의 인생에 대한 실마리를 찾는 답을 구하는 여정이였다. 길은 스스로를 더 들여다 보라고 대답했다.

살아온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태도의 전환이나 변화로 비롯되는 어떤 분기점. 나는 그것을 이곳에서 제대로 맞이 하고 있는 것일까? 


더 많은 것을 손에 쥐지 않으려 하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살아가고 싶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설령 또 다른 실패를 하더라도 떳떳히 마주할 수 있는,

내게 주어진 나머지 절반의 삶. 


설령 그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더라도, 그럴 용기가 없더라도 삶의 시계는 계속 흘러갈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매일의 오늘이, 나를 사랑할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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