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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함에 이르렀기를 (3)

병동 한 구석에서 새어 나오던 불빛의 정체

검사 결과는 경증의 영양 결핍 소견을 제외하고는, 모두 정상이었다. 


위 내시경, 대장 내시경은 과연 10대 후반의 어린 나이답게 티끌 하나 없이 깨끗했다. 머리 MRI 역시 이상 소견 없이 모두 정상이었다. 

혈액검사에서는 철 결핍 빈혈 소견과 비타민D, 칼슘 및 아연 부족 소견이 있었지만, 역시 심한 건 아니었다. 영양제 보충만 해준다면, 결국 잘 먹으면 모두 해결될 문제들이었다. 


교수님이 병동 스테이션으로 어머니와 아이를 모두 불러와서 앉혀놓고 천천히 설명을 시작하셨다.


"...... 자, 이제 다 들었지? 몸은 아픈 데가 없어요. 소화가 안될만한 병이 있는 게 아니니깐, 안심해도 좋아. 그러니 가장 중요한 건, 스트레스받지 말고, 즐겁게 지내는 거란다. 그러면 점점 먹는 양도 늘어날 거야. 알겠지?"

"네"

목소리는 작고 수줍었지만, 표정은 밝았다. 


"교수님, 혹시 정신과 협진은 어떻게 할까요?"

"음... 일단 본인이나 보호자 분이 원하시는 게 아니면, 조금 더 지켜보자. 아이 본인도, 보호자 분도 피드백이 좋은 분들 같아서, 일단 영양 수액이랑 영양상담팀 교육 후에 회복되는 거 보고 결정해도 될 거 같아. 만약에 회복이 안되고 문제가 지속되면, 내가 외래에서 정신과 진료로 보내면 되니깐."

"네, 알겠습니다."

"정신과 OOO 교수님이랑은 이미 한번 얘기했었어. 서둘러야 되는 환아는 아닐 거 같다고 이미 말씀하셨거든. 내가 소아과에서 좀 더 끌고 가보겠다고 말씀드려놓을게."

"네, 교수님."


그렇게 이틀 간의 영양 수액 치료와 영양상담팀과의 교육 후에, 드디어 퇴원 날이 되었다. 5일 만의 병원 탈출, 고등학생에게는 병원 생활이 많이 답답했을 것 같아서, 얼른 퇴원시켜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레지던트들은 교수님과의 회진(Rounding-라운딩) 전, 밤 사이의 환자 상태를 미리 파악하며 먼저 회진을 도는, pre-rounding(프리 라운딩)을 하게 된다. 프리 라운딩에서 환자의 검사 결과, 현재 상태 등을 꼼꼼히 파악해두어야, 회진 때 놓치는 것 없이 교수님께 노티를 하고 치료 계획을 상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침 콘퍼런스 발표가 오전 7시 반, 그 후 바로 회진을 돌기 때문에, 프리 라운딩은 오전 6시에는 시작해야 환자 파악을 완벽하게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여느 때처럼 오전 6시에 출근해서 컴퓨터로 환자 상태를 파악한 뒤에, 6시 반부터 혼자 프리 라운딩을 돌기 시작했다. 병실 3개를 지나치고 4번째, 오늘 퇴원하는 그 아이를 만나러 가려는데, 컴컴해야 할 방이 커튼 사이로 새어 나오는 불빛 때문에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안녕-! 안 자고 있었......"


세상에.

병원 침대에 붙어있는 간이 책상에 문제집 3권이 쌓여 있었다. 한 손에는 영어 단어장을, 한 손에는 펜을 든 채로, 원래도 큰데 놀라서 더 커다래진 눈이 나를 땡글땡글 쳐다보고 있었다. 배시시, 웃더니 고개를 끄덕하며 인사를 한다.


"병원에서는 공부하지 말고 쉬랬잖아. 퇴원하는 날 벌써 이러면 내일부터는 얼마나 더 열심히 하려고!"

생글생글 웃는 모습에 화를 낼 수도 없었다.

하얀 피부에 가녀린 팔목을 보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대한민국에서 입시 스트레스를 모르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도 원하는 대학, 원하는 과에 가려고 재수까지 해봤던 입장에서, 저 절박한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더군다나 아빠도, 형제자매도 모두 굴지의 OO대학교에 다닌다고 하니, 압박감과 초조함이 남들보다 더 심할 것임이 분명했다. 

사실 이미 공부를 잘하는 아이다. 부모님도, 주변 선생님들도 스트레스를 주진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본인 스스로가 본인을 몰아 새우고 있었다. 이렇게 노력하지 않으면, 뭐라도 하지 않으면, 불안함이 엄습해 오는 것일 테다.  


괜한 오지랖인걸 알면서도, 결국 참지 못하고 한마디를 건넸다.

"OO야, 너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들었어. 오늘 집에 가고, 학교에 가서도, 이전에 해오던 것보다 10프로 정도만 힘을 빼도 괜찮아. 그렇다고 성적이 갑자기 떨어지거나 하는 일은 없어. 마음을 편히 먹어야 속도 편안해지고, 잘 먹고 건강해야 또 공부도 더 잘되는 거니깐. 알았지?"


안타까운 마음에 두서없이 나오는 말이었는데, 똑똑한 녀석은 벌써 다 알아듣고서는 알겠다고, 조용히 대답하며 또 웃어 보였다. 



폭풍 같은 오전 일과를 마치고, 오후 업무를 하던 중, 퇴원 준비를 마친 녀석이 어머님과 함께 병동을 찾아왔다. 간호사 선생님들께 고맙다며 먹을 것이 담긴 상자를 건네시고는, 나에게도 감사했다며 인사를 하셨다. 나도 꾸벅, 인사를 하고서는 엘리베이터를 타러 가는 그 뒷모습을 물끄럼, 쳐다보았다.


그 뒷모습이 괜히 또 안쓰러웠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인사를 한마디 전하고 싶었다. 말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망설였다. 

그러다가 결심이 섰고, 따라나섰다.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있었다. 


"어머, 선생님!"

어머님이 먼저 알아보시곤 놀란 눈으로 쳐다보셨다.


"OO야."

"네?"

"너무 애쓰지 마! 알겠지?"

"... 네!"

"조심해서 가! 어머님 조심해서 가세요!"


엘리베이터 문은 금방 닫혔다.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뒤돌아서 얼른 할 일을 하러 의국으로 갔다.

부디 건강했으면. 짧은 기도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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