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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지 Nov 13. 2023

반드시 한 길로만 갈 필요는 없잖아

<다시 쓰는 성장일기> by 빅이지

사실 처음부터 누군가를 도와주는 일을 업으로 삼으려던 건 아니었다. 내 문제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한 유년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주변에 관심을 가질만한 여유가 없었다. 학창 시절 누군가를 도와줬던 기억은 학교에서 단체로 간 “꽃동네” 봉사활동이 유일했다.


그런 내가 처음으로 나 아닌 주변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배낭여행을 통해서였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새로운 경험을 쌓고자 배낭여행을 다녔는데, 배낭을 메고 가야 하는 험지를 먼저 가자라고 생각했던 게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인도, 네팔, 튀르키예, 필리핀, 말레이시아, 태국 등의 국가로 인도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주한 빈곤은 내가 그동안 봐온 가난함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못 사는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먹고, 자는 최소한의 욕구조차 충족되지 않는 처절한 현실에 한편으로는 한국에서 태어나서 다행이라는 안도감과 함께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불평등한 현실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러던 중 우연히 필리핀에 있는 ESA(Entrepreneur School of Asia)라는 곳에서 주관한 여름 학기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 8개국에서 모인 9명의 학생들이 같은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면서, 국제사회의 빈곤과 불평등에 관한 강의도 듣고, 일주일에 하루는 빈민 가정에서 먹고 자면서, 그들의 삶을 간접적으로 체험해 보는 프로그램이었다.


나에게 배정된 나나이(현지어로 엄마를 뜻함)의 집은 10평 남짓으로 무려 11명이 함께 살고 있었다. 지대가 낮은 동네라 곳곳이 침수되어 바지를 허벅지까지 걷어 올리고 가야 했고, 집 주변은 쓰레기 밭이라 이런 곳에서도 정말 사람이 살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열악했다. 또한 집은 얼마나 좁은지 옆에 사람과 거의 어깨가 닿을 정도로 바짝 붙어서 자야 했는데 가족 전체가 누우면 발을 디딜 틈조차 없어서 자기 전에 무조건 화장실을 다녀와야 했다. 안 그러면 오밤중에 가족 전체를 깨워야 했으니 말이다.


우리 집 나나이는 코코넛으로 떡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았는데, 더운 시장통에서 하루 종일 고생해도 손에 쥐는 건 고작 몇천 원이 다였다. 필리핀에 처음 도착했을 때 슈퍼마켓에서 샴푸, 린스는 물론이요 식용유, 간장 등 모든 생필품을 1회용으로 낱개 포장해서 팔고 있는 이유가 궁금했었는데, 나나이가 하루에 얼마 버는지를 알게 된 후에야 그 의문이 풀렸다. 뭐든 한 병씩 사는 게 훨씬 더 경제적이지만 당장 그렇게 살 돈이 없기 때문에, 필요할 때마다 1회용을 하나씩 사서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나는 나나이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원가를 계산해서 가격을 산출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천연 색소를 활용해 알록달록한 코코넛떡을 만들어 다른 코코넛떡과 차별화하는 방안도 시도해 봤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나나이 가족들과 처음에는 말이 잘 안 통해서 얼굴 마주 보고 앉아 있는 것조차 어색하고 불편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친해졌다. 가장 즐거운 시간은 늘 저녁 식사 시간이었는데, 건더기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반찬 하나에 치킨 스톡을 베이스로 한 야채수프가 다였음에도 불구하고 가족들끼리 도란도란 둘러앉아 "하하", "호호" 웃으면서 밥 먹는 게 너무 좋았다. 하루는 벽에 엄지손가락 만한 바퀴벌레랑 개코 도마뱀이 마주 보고 있었는데, 할머니가 둘이 너무 사랑해서 저러고 있는 거라며 던진 농담에 가족들이 한 마디씩 거들면서 한참을 웃고 떠들었다. 나는 가난하기 때문에 당연히 불행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작은 거 하나에도 이렇게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물질적으로 더 많은 것을 가졌다고 해서 반드시 더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나는 가족들과 이렇게 한자리에 모여서 웃고 떠들며 밥 먹은 게 언제였는지 조차 기억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필리핀에서의 인턴십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왔을 때, 나는 내 주변에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도와야겠다는 의지로 불타 있었다. 그래서 내가 활동하고 있던 한중교류협회에 봉사분과를 만들어 주변 고아원에 격주로 봉사활동을 다녔다. 그러다 고아원이 재정난으로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뭐라도 돕고 싶은 마음에 "Share your love"라는 자선 바자회를 기획했다. 2008년도는 미국발 금융위기로 경제가 너무 어렵고, 또 중국 내에서 봉사, 기부 등의 자선 활동이 활발하지도 않았던 시절이라, 자국 학생도 아닌 유학생이 개최하는 자선 바자회에 대한 학교 측의 승인을 받기가 어려웠다.


그럼에도 나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설득해서 마침내 승인을 받아냈고, 협회 친구들과 함께 발 벗고 뛰어다니면서 기업들한테 물품 후원도 받고, 학생들로부터 안 쓰는 중고 물품도 기부받았다. 또한 사람들을 더 많이 끌어모으기 위해 사물놀이 등의 문화 공연과 김밥, 떡볶이 등의 먹거리도 준비했다. 다행히 바자회는 성공적으로 끝났고, 우리는 17,000 위안 한화로 약 300 만원을 고아원에 기부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바자회를 통해 누군가를 도와주는 일이 이렇게 행복하고 보람찬 일이 될 수 있구나를 처음 깨달았고, 누군가를 도와주는 일을 내 업으로 삼으면 내 인생이 더 풍요로워질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그 후로 지금까지 나는 누군가를 돕는 일을 해왔고, 한 순간도 최선이 아니었던 적이 없으므로 이 일을 선택한 것도, 또 그만두는 것도 후회는 없다. 다만 히말라야 산 정상을 올라가는 길이 하나가 아닌 것처럼, 누군가를 도와주는 일에도 하나의 길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이제라도 내가 가장 잘할 수 있고, 또 내가 가장 즐길 수 있는 방법을 통해 누군가의 삶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그런 인생을 살고 싶다.   


2023년 11월 13일 뉴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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