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다상량

憂雨(근심이 비처럼)

비가 올 때 떠오르는 심상

by 곤 Gon

머리가 젖었다. 하늘에서 물이 떨어진다. 아 씨. 우산 안챙겨나왔는데. 크록스 신어서 양말 다 젖겠네. 세차는 나중에 해야겠다. 하늘에서 물이 갑작스레 떨어지면 내 마음 속 짜증의 지분이 넓어진다. 내 계획, 내 예상과 상관없이 벌어지는 일이 내 행동에 제약을 주거나 영향을 미칠 때 대개 나의 반응은 짜증이다. 어떤 때는 일기예보를 보고 우산을 챙겨나오기도 한다. 마침 하늘이 어두워지고 물이 낙하하기 시작하면, 미처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다른 사람들이 옷을 적셔가며 이리저리 뛰는 걸 보면서 비열하고 쪼잔한 통쾌함에 킬킬거리기도 한다.


한창 유행 중인 MBTI에 의하면 나는 ENFP. 좀 극단적으로 즉흥적인 것을 즐기고, 계획을 혐오하는 성향이 강한데, 어느 때부터인가 마음이 작아진 나는, 즉흥적인 하늘의 표정에 따라 박자를 맞추기가 힘겨워졌다.


중간고사가 막 끝난 20대 어느 날, 동아리에서 으쌰으쌰 대성리로 MT를 갔다. 물총으로 서로를 겨누며 총알 대신 물을 발사했다. 광장에서 매일 이라크 전쟁 반대를 외치던 우리는 그날만은 다른 사람이 되어, 사람을 향해 총구를 겨누던 일에 몰두해있었다. 나는 수돗가로 가서 양동이에 물을 받아 내 머리 위에서 뒤집어 홀딱 젖었다. 그 순간 이후 나는 총알을 튕겨내는 슈퍼맨이 되었다. 친구들을 물투성이로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뛰어다녔고, 마른 옷을 수호하려는 민간인들은 물총을 든 학살자를 피해 도망 다녀야 했다. 놀이가 끝나고 나는 팬티까지 다 벗어 숙소 앞 빨랫줄에 널어놓았다. 숙소에서 가장 얇은 이불을 골라 몸을 감싸고 빨래집게로 고정한 옷을 대충 만들어 입었다. 밤새 동지들과 어깨 걸고 술을 마시고, 팔뚝질을 하며 노래를 불렀다. 숙취와 함께 일어난 아침, 나는 아연실색했다. 옷이 마르기는커녕 밤새 하늘에서 쏟아진 물로 제주 해녀의 그것처럼 물옷이 되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젖은 옷을 챙겨입고 덜덜 떨며 기차를 타고 청량리역으로 돌아왔지만,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는 재미로 각인되어있다.


30대가 되어 결혼을 하고 아내와 런던으로 신혼여행을 갔다. 폐백 때 입었던 한복을 챙겨가서 입고 내셔널갤러리와 노팅힐 시장을 활보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어느 나라 왕족인지 물었고, 엘레강스를 연발했다. 버킹엄 궁전을 향해 하이드 파크를 가로질러 가는데, 하늘에서 또 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내의 긴 한복 치마가 흙길을 걸으며 갈색으로 물들었다. 그래도 우리는 웃었다. 그러한 이벤트 하나하나가 너무 즐거웠다. 세탁하면 되지 뭐. 사진이나 찍자. 머리는 다 젖어서 떡이 되었지만, 우리의 엘레강스는 빼앗지 못했다.


아이가 태어난 이후 부터 였나? 즉흥적인 상황이 더 이상 달가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갑자기 토를 하고, 갑자기 한 밤 중에 열이 나고, 갑자기 기저귀가 새고, 갑자기....갑작기... ‘갑자기’가 갑자기 너무 많아졌다. 즐길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물론 갑자기 눈을 맞추고, 갑자기 배냇짓을 하고, 갑자기 걷기 시작하고, 갑자기 말을 하고, 갑자기 눈부신 순간들을 많이도 안겨줬다. 그래도 갑자기는 언제나 긴장을 유발하고, 내 감정과 행동을 요구했다. 갑자기 우울증도 찾아왔다. 세상은 회색이 되었고 무망감에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먹구름이 드리웠다. 우산도 없고, 우비도 없고, 처마도 없고, 지붕도 없는데 하염없이 끝날 줄 모르는 장마가 지속 되었다. 그 어떤 ‘갑자기’에도 대응할 힘이 없었다. 계획은 계획대로 수립된 순간부터 계획이 실행될 때까지 스트레스로 나를 압박했다. ‘갑자기’도 없고 계획도 없는 無의 순간만 지속되기를 바랐다. 그런데 사람들은 날씨가 맑아지면 무엇을 할건지, 맑아지기 전까지 어떻게 버텨낼 건지 물어댄다. 지치지도 않고 기대의 눈동자를 들이민다.


일주일에 50분씩 내 얘기를 경청해주는 사람이 그러더라. 비가 내릴 때 그 비를 하릴없이 맞고 서 있지 말자고. 적극적으로 비를 피할지, 맞을지 정하는 것은 바로 나고, 내가 나 자신을 케어할 힘, 존중하는 힘, 자존감이 없으면 그것을 할 수 없다고 하더라. 무망감은 자존감이 낮아서 아예 없어져 버린 사람을 지배한다고 하더라.


그래. 뭐라도 원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오늘도 과랑과랑 내리쬐는 햇볕 아래 뼛속까지 다 젖어있는 나는 거울 앞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야 시발 이거 개꿀잼인데 한 번 해볼까?”

그리고 오픈채팅 검색에 ‘글쓰기’를 검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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