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다상량

호명(呼名)

이름을 부르다

by 곤 Gon

구름 낀 오후, 어느 숲 속의 카페에 앉아 멧비둘기 한 마리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순간, 내 가슴팍 앞에 까만 것이 휙, 나는 손을 홱 휘둘러 그것을 잡아챘다. 산모기구나. 벌써 모기가 나타나는 계절이 되었구나. 산모기를 잡아챈 손을 펼쳐보니 그것은 산모기를 닮은 이름 모를 검정 곤충이었다. 미안함과 부끄러움이 온몸을 휘감았다. 자기 중심성으로 무장된 나는 검은 곤충이 지나가자마자, 그것이 내게 앉아서 피를 빨지도 않았음에도 해충이라 여겼다. 그리고 너무도 손쉽게 목숨을 빼앗았다. 내게 해를 끼치는 해충이면 죽여도 되고, 아니면 죄책감을 느끼는, 이런 모순적이고도 선택적인 감정에도 소름이 끼쳤다. 해충을 분류하고 그것에 폭력을 행사하며 손쉽게 죽이기까지 할 수 있는 권능은 어떻게, 왜 내게 주어졌는가?


성경 창세기에는 세상을 창조한 신이 이렇게 말한다.

“보기에 참 좋구나.”

곧이어 성경의 신은 인간을 만들고 다시 이렇게 이야기한다.

“세상을 다스려라.”

신의 기준에서 인간인 나는 세상을 다스릴 만큼 지혜롭지도,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사랑이 많지도 않다. 오히려 내 욕심을 위해 세상을 착취하고, 파괴하기를 서슴지 않으며, 타인을 제대로 공경하거나 존중할 줄도 모른다. 내 유익과 친분 앞에서 판단을 휘게 하며, 거짓말을 일삼는다.


입으로는 공장식 축산에 반대한다면서 고기를 탐하고, 동물을 가두면 안 된다고 말하면서 내 아이는 동물원과 아쿠아리움에 데려간다. 신기한 것들을 보여주는 뿌듯함을 가지고, 갇혀있는 동물들을 관람시켰다. 어디 이뿐인가? 세상이 아름답다고 했던 신의 견해와는 정반대 되는 태도를 취하며 세상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면서 절망과 우울의 감탄사만 내뱉는 신성모독을 매일 감행하고 있다. 나는 신, 하늘, 한얼이 내게 부여한 권능을 이따위로 밖에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한얼은 나를 빚을 때에 이 세상을 다스리기에 적합한 존재로 제작했을 터인데, 나는 어디서부터 비정상적인 작동이 시작되었는지, 지금은 완전히 고장이 나서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아. 나의 주어진 권능은 거울이었던 것인가? 타산지석의 그것이었단 말인가?

“세상 사람들아 이 녀석을 보아라! 내가 너희에게 내린 특별한 그 계시를 수용하지 못한 자의 모습을 보아라!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면서도 자기의 행복조차 찾지 못하는 이 어리석은 자의 불행한 모습을 기억하라.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준 계시와 권능을 활용하여 세상이 제 이름대로 운영되도록, 세상 만물이 그 얼굴을 찾을 수 있도록 다스려라. 그러면 행복할 것이다.”


뭐... 이건 내 과대망상이고, 솔직히 신이 내게 어떤 命을 내렸는지, 내게 어떤 名을 주었는지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도 나는 이름 모를 검정 곤충을 살해했고, 부끄러움에 양손으로 내 얼굴을 가리운다.

다스린다는 것은 이름 모를 ‘그것’을 호명하고 관계를 구축하고 관계를 기반으로 그것을 통제하는 것. 오늘 나의 폭력으로 죽은 곤충에게는 이름이 없다. 이름을 붙여주는 따위의 위선은 행하기 어렵다. 그만큼 사랑하지도, 아끼지도 않았으니까. 신은 나를 사랑하기는 할까?





옆 테이블에 방금 온 모녀가 음료를 주문하고 앉았다. 어미가 아이에게 이야기한다.

“이안아, 엄마가 너 임신했을 때, 여기 이 자리에서 주스 마셨다. 그런데 우리 이안이랑 여기 다시 같이 온 거야. 신기하지?”

어미의 말을 듣던 아이는 테이블 위의 검정 곤충을 보더니 어미에게 소리친다.

“엄마 이거 벌레야? 죽여버려! 죽여버려! 으악! 징그러워!!”


잠시 후 아이는 산에서 들려오는 뻐꾸기 소리를 흉내 낸다.

"뻐꾹! 뻐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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