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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

마음은 어디에 빼다 놓고, 껍데기만 남아있나

by 곤 Gon

식물은 자신의 신체가 손상당할 때에 어떤 화학물질을 배출하여 주변 식물들에게 위기를 알린다고 한다. 아마존 정글 한쪽 끝에서 나무를 자르면 그 나무에서 분비되는 화학물질과 동일한 성분의 화학물질을 정글 반대편 나무에서도 분비한다고 들은 적이 있다. 사실인지 여부를 떠나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난 이후, 샐러드를 먹을 때, 특히 샐러리를 베어 물 때 입 안에 퍼지는 그 푸릇한 향기가 어떤 종류의 비명처럼 들린다. '진격의 거인'에서 '에렌'의 어미가 거인에게 잡아먹힐 때에 흘리는 눈물과 외치는 비명이 겹쳐져, 나는 일종의 식물을 잡아먹는 거인이 된 듯하다.

얼마 전까지 한반도 남쪽의 인간들은 '폭싹 속았수다'를 보면서 나무로 만든 휴지 수천 장을 적셨다. 드라마 속의 '애순'과 '금명', 그리고 '관식' 및 기타 인물들에게 이입하며 그들을 공감하고 아마존의 그것처럼 한반도가 동일한 성분의 눈물을 쏟아냈다. '폭싹 속았수다'가 일종의 공감을 요청하는 비명을 탁월하게 지름으로써 우리는 그에 반응하는 눈물을 흘렸다.

공장 굴뚝 위에, 철탑 위에, 관청 캐노피 위에 올라가 비명을 지르는 사람이 있다. 제발 내 흐르는 눈물과 내 이야기를 읽어달라고 외치는 아우성이 있다. 그러나 언론은 그들의 입을 막아 그것이 전달되지 못하게 한다. 아니, 전달된다 한들 이미 한반도 남쪽의 인간들을 그런 종류의 비명에 공감하는 행위는 '빨갱이'나 '운동권'같은 불가촉천민이나 하는 것이라는 사회적 분위기, 일종의 타부를 만들었다. 그리고 성공적으로 그런 종류의 공감을 단절시켜 왔다. '폭싹 속았수다'만 해도 '제주'하면 빼놓을 수 없는 '4.3 사건'의 상흔을 삭제했다. 혹시나 그것이 한반도 남쪽 사람들의 눈물 파도타기에 장애가 될까 두려웠던 것은 아니었을까?

자본주의는 시민의 공감 파도타기가 얼마나 무서웠으면 그것의 종류마저도 이처럼 철저히 통제를 하는 것일까? 우리는 언제부터 동맥경화에 걸려 타인의 피눈물이 우리의 혈관을 타고 흐르지 못하게 통제하기 시작했는가? 왜 누군가 눈물 흘릴 때, 이유 없이 같이 눈물 흘리는 게 촌스러운 일이 되었는가?
그래도 그나마 '폭싹'에 눈물 흘리고, T발놈을 욕하며 F의 공감능력을 그리워하는 그런 본능이 아직은 살아있는 것 같아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사실 '무정부주의자'라고 자칭하는 나는 간절히 고대한다. 온 인류가 서로의 비명에 장이 끊어질 듯 아파하며 눈물 흘리는 예수의 공감능력을 회복하는 날을. 아마존은 그것을 하고 있다.

어제부터 너무 더워진 날씨에 도로 정비가 한창이다. 오늘 올림픽대로 갓길에 무성히 자란 생명의 허리를 끊어내는 작업에, 그들이 비명이 내 코에 들린다. 나는 창문을 닫고 무심하게 음악을 크게 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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