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서 회복되는 자아
날씨가 좋다. 아니, 맑다. 약간 덥다. 그래서 나무 아래로 자리를 옮겼다. 나무는 이파리들로 햇빛을 가려주었고 나는 그 아래에 머물렀다. 바닥에 무늬가 보인다. 햇빛이 투과한 곳과 그렇지 못한 자리들이 어우러져 무늬를 만들어낸다. 광명 또는 암흑이 군림하지 않는 이 아름다움이 좋다.
어느 문화의 영향인지, 사상의 영향인지, 종교의 영향인지 모르겠지만 빛은 선한 것, 어두움은 악한 것으로 그려질 때가 많다. 빛은 생명을 키워내고, 가려진 것을 드러내고, 소독하고, 치유하고, 정화하는 유익한 것이다. 그러나 지구가 해를 등 뒤로 가려줄 때에 마침내 식물들은 광합성하느라 지친 육신을 호흡을 하며 휴식을 취하고, 경쟁 속에 여기저기 긁히고 피나는 영혼들은 그 상처를 싸매고 보듬고 감추는 시간을 갖는다. 그렇게 그림자 속에서 회복을 하고 숨을 고르는 시간이 보장될 때에 다시 들어선 빛 속에서 또 다른 한 걸음을 뗄 수 있다.
친구가 오랜 기간 아픈 몸을 추스르며 휴직을 하다가 최근 복직을 했다. 주변 사람들은 일을 다시 시작한 그에게 ‘축하해’, ‘화이팅’이라며 새로운 시작을 응원했지만, 나는 그가 조금은 일을 쉬엄쉬엄 천천히 적응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휴식을 취하는 밤의 시간이 끝났지만, 곧바로 정오의 햇볕을 향해 달려가기보다 새벽 어스름의 시원한 공기부터 맛보며 떠오르는 여명을 즐기고 자연스레 낮의 분위기에 녹아들 수 있기를 기도하고 기원했다.
나는 ‘근로자’, ‘근로기준법’이라는 말을 혐오한다. 왜 노동을 ‘勤勞(근로)’로 명명하여 ‘열심히’ 일하는 것을 당연하게 만드는가. 생명의 요구보다 자본과 권력의 요구에 민감하게 귀 기울여 만들어진 이 ‘근로’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빛을 속에 머무를 것을 강요한다. 이런 방식의 사고이기에 사람들은 사람보다 ‘근로’에 더 적합한 AI와 휴머노이드의 개발에 위협을 느끼고 두려워하게 되었다. 사람과 생명은 더 이상 이러한 기준으로 그 유용성을 판단받으면 안 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상태를 살피며 어떤 때에는 빛 속에 거하고, 어떤 때에는 그림자 속에 머무를 수 있는 자율성을 보장되어야 인간성도 보장된다.
물론 자기 조절능력을 상실하여 그림자 속에만 머무는 이들을 도와 빛으로 이끌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와 마찬가지로 신체와 정신의 요구에 둔감해진 채 빛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며 경주하는 이들이 번-아웃되기 전에 어둠 속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도울 수도 있어야 한다. 그렇게 균형이 이루어질 때에 빛과 어둠, 어느 곳에 거하든 그 시간을 충만히 누리고 자신과 타인을 사랑하며 돌볼 수 있는 힘과 탁월함이 쌓인다.
광야와 같이 그림자 하나도 없는 세상이 무섭다. 요나가 그렇게 즐거워하고 사랑했던 포도덩굴이 필요한 시대이다. 로뎀나무가 필요하다. 사명도 좋고 소명도 좋고 미래와 꿈(Vision)도 좋지만, 우리는 또 다른 꿈(Dream)도 꿀 시간도 필요하다.
신은 지구가 같은 속도로 돌게 만들었다. 적절하게 빛과 그림자를 오가도록 만들었다. 안식일을 지정하여 쉬도록 명령했다. 희년을 정하여 땅도 쉬게 하였다. 생명은 그렇게 존중된다.
심호흡을 해본다. 코로 들이쉬고, 3초간 참았다가 입으로 ‘후우~’
따사로운 햇빛을 피해 나무 밑에서 숨을 고른다. 자. 이제 어디로 발을 내디뎌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