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읽는 시간
우연히 클라우드에 자동 업로드 되어있던 옛 글을 읽었다. 당시 나는 무리 속에서 매우 힘겨워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어떻게 하면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일 수 있을지 고민하며 애쓰고 있었고, 아이들을 육아하느라 심신이 지쳐있었다. 집은 엉망진창인 상태였고, 해야 할 가사 일은 넘쳐났지만 무력감에 빠져서 손도 못 대고 있었다. 글을 읽는데, 정말 그때의 무력감과 답답함이 다시 살아나 내 심장을 에워쌌고, 이에 잔뜩 주눅 든 내 심장은 눈치를 보며 콩닥거렸다.
혼자가 된 지금, 고독, 그때의 고통을 읽는다.
의도한, 의도치 않은 행위와 실수들이 겹치고, 자의와 타의가 겹쳐 혼자가 되었다. 관계가 끊어진다는 것은 이어져 있던 혈관이 단절되어 생명 같은 혈액이 빠져나가 창백해지는 일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이 지나 지혈이 되고 상처가 나으면, 그 흉터를 만지면서 그때의 고통을 읽을(고독) 수 있게 된다.
고독은 외로움과는 다르다. 외로움은 혼자됨을 해소하기 위해 관계를 추구하게 하는 욕망이다. 고로 외로움은 목마름이고 채워지지 않는 무저갱이다. 그렇기 때문에 외로움에 근거해서 관계를 형성하면 상대를 붙들고 구렁텅이에 빠져들어가 상호 간에 괴로움을 필연적으로 발생시킨다. 다만, 어떤 때에는 그 외로움이 신과의 조우를 이끌어 내기도 하지만, 이 마저도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해 만든 금송아지를 신격화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편, 고독은 자의적으로 처하는 홀로 됨이다. 그 출발점이 군중 속이든 원래 혼자 있었든 상관없이, 그저 홀로 됨 속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고독해진 인간은 고해(苦海) 속에서 살아온 자신의 과거를 한 걸음 떨어져서 관조하고 차근차근 해석하는 시간을 비로소 체험할 수 있다. 당시에는 이해 안 되던 고통들이 해석이 되고 다시금 그때의 반응과 감정들을 복습하면서 내가 원했던, 해야 했던, 받아야 했던 반응을 제공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이 의미는 현재를 살아갈 때에 한걸음 발을 내딛을 수 있는 단단한 기반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고독의 시간은 필요하다.
하지만 지그문트 바우만은 그의 저서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에서 유동하는 현대의 인간은 고독의 시간을 빼앗겼다고 한다. 그렇게 자신을 재해석할 시간과 능력을 잃어버린 현대 인간상에 큰 안타까움을 표한다. 너무 동의하는 부분이다.
2024년, 혼자가 된 나는 끊어진 관계들(나-신(神), 나-나, 나-타자)에 아파하고, 생명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창백했었다. 외로움에 사무쳐 알코올로 정신 흐리기를 수없이 시도하기도 하였고, 의미 없고 가벼운 관계들에 열중하기도 했다.
그러던 와중에 좋았던 시절을 기억나게 하는 동네 작은 서점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진행하는 글쓰기 모임에 합류하게 되었다. 이것이 우연히 글쓰기를 통해 내가 고독의 시간으로 타박타박 걸어 들어가게 된 기회가 되었다.
글쓰기를 하면서 고독의 시간을 매일 사수한 결과, 외로움을 비롯하여 행복을 약속하는 가짜 욕망들은 어느 정도 제어가 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나를 채우기 위한 공허함에 추동되는 삶이 아니라 적극적인 자세로 인생을 개척해 나아가는 기분이다. 나는 오랫동안 타인의 기준에 맞추어, 세상이 요구하는 수준에 도달하려, 끝없이 타인의 사랑과 관심을 구걸하면서 거지같이 살아왔다. 내 삶과 행위에 대한 타인의 평가와 해석이 아니라, 내 자신의 해석을 갖게 되고 나니 비로소 이제야 나는 내 삶의 주인이 되었음을 느낀다. 이런 자유, 그리고 책임감이 낯설지만 너무 반가운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