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루사같은 인간상

by 곤 Gon

1992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첫 손주이다 장손이었던 나는 할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었다. 할아버지는 많은 사람들에게 불편한 존재였지만 나에게는 천사 같은 사람이었다. 심한 알코올 중독으로 내가 기억하는 할아버지는 모든 순간 2L짜리 물렁물렁한 플라스틱 병에 든 막걸리를 사발에 따라 마시는 사람이었다. TV에서 권투라도 하는 날이면 옆에 다가갈 수도 없었다. 술에 취해 주변을 둘러보지 않고 주먹을 이리저리 휘두르면서 권투 시청에 몰두했기 때문에 곁에 갔다가는 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너무 이뻐하는 장손이기 때문에 당신의 무릎에 앉을 수 있었다. 내가


“할아버지 술 그만 드세요!”


하면,


“알았다. 이 할애비가 이제 술 안 마실게!”


하고 약 한 시간 정도는 술 마시는 시간이 멈춰지기까지 했었다. 나중에는 그것마저도 안되었지만.


할아버지는 나에게만은 조심스러웠고 사랑스럽게 대했다. 얼굴에 당신의 까끌까끌한 수염을 문지르며 애정 표현을 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그런 할아버지가 몇 차례 심한 알코올 중독으로 원주의 큰 병원에 강제 입원을 당했었고, 말년에는 검은 피를 쏟아내고 돌아가셨다. 간경화가 너무 심했었다.


92년, 할아버지의 상여 앞에 할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들고 통곡을 하면서 걸었던 기억이 난다. 할아버지의 시신을 매장하고 차 타는 곳 근처에 내려왔는데, 삼촌들이 낙심한 나를 달래주려던 건지 옥수수밭에서 서리해 온 옥수수를 꼬챙이에 꽂아 불에 구워주었다. 그래서 옥수수 철이 된 이 여름, 옥수수를 먹을 때마다 할아버지 생각이 문득문득 난다. 동시에 할아버지의 검은 피도 같이 떠오른다.


할아버지의 간은 그 주인이 몸에 들이붓는 알코올 독을 해독하다가 그 한계를 넘어서 딱딱하게 굳어버렸었다. 그렇게 해독이 안된 혈액은 검정 빛깔을 띄었다.



타인과 맺는 관계는 혈관과 비슷하다. 관계를 맺는 순간 나의 피가 그에게 흘러가고 그의 피가 나에게 흘러들어온다. 여럿이 맺는 관계망은 모세혈관처럼 혈관이 퍼져서 상호 간에 혈액이 순환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맺어진 관계에서는 혈액이 순환되면서 생명이 형성되고 관계 자체가 하나의 자연인처럼 존재하게 된다. 이 관계는 모임, 단체, 법인, 국가 등 여러 형태로 존재한다. 그래서 이 같은 관계망에서 강제로 떨어져 나가거나 쫓겨나는 것은 혈관이 단절되는 것과 같은 고통, 즉 거절감 또는 단절감을 느끼면서 죽음과 같은 괴로움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어떤 단체나 모임의 최고 징계는 추방이다.


어떤 이는 관계망 또는 관계 내에서 ‘독’ 같은 존재가 되기도 한다. 관계 자체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존재가 있다. 그와의 관계는 잘라내면 아프긴 하지만 거기에서는 검은 피가 흐르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단절로 인해 전체 생명이 건강해지는 것을 보기도 한다. 한편 ‘우루사’ 같은 존재도 있다. 관계 가운데 간기능을 향상해 버려서 ‘독’ 같은 관계를 무력하게 만들고 생명의 순환으로 치환하는 존재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맺는 관계 가운데 흐르는 피의 색깔을 잘 봐야 한다. 이 사람과 맺는 관계가 독이라면 적당히 해독하면서 지속 가능한 관계인지, 간기능을 손상할 정도로 독이 되는 관계인지, 아니면 간기능을 회복시켜 줄 만큼 건강한 관계인지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


알코올처럼 당장에는 즐거움과 활력을 주지만, 어느 정도 선을 넘어서면 감당이 안되고 전체 생명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독도 있다. 할아버지는 막걸리를 벗 삼아 사셨지만, 결국 막걸리를 감당하지 못하셨다.


경험상, 보통 확언을 하는 존재들이 ‘독’ 일 가능성이 높다. 언론이든 정치인이든 종교든 이데올로기든 너무 명확하고 단호한 어조로 인생과 진리와 사건에 대해 단언하고 다른 가능성들에 대해 고민할 필요도 없게 만들어주는 발화자들은 경계해야 한다. 그들 안에는 생명 대신 검은 피가 흐르는 경우가 많다. 그들과의 관계에서는 얼른 뒤돌아서 도망치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한다. 가까이 있다가는 그 검은 피가 나의 생명을 대체하고 지배당하고 죽음에 끌려가기 십상이다.


고민하는 능력은 곧 관계 내의 간기능을 건강하게 한다. 피를 거르는 능력을 향상하기 때문이다. 고민하는 것은 귀찮은 일이지만, 자유인은 생각하는 노동을 쉬면 안 된다. 고민하고 결정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


오늘날 많은 파시스트, 종교 근본주의자들이 득세하는 것을 본다. 강력한 리더십이 마치 세상과 나를 구원해 줄 것이라고 믿고 내 고민할 부분 - 권리이자 의무인 – 까지 리더십에 맡기고 자유의지로부터 벗어나 노예처럼 안식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다. 노예는 고민 없이 결정대로 따르고 책임은 지지 않기 때문이다. - 그러나 과연 책임을 지지 않을까? 지금도 히틀러에 대한 책임을 독일인들은 지고 있다.


자유인인 나는 내가 고민해서 선출한 권력이라고 하더라도 계속 그 또는 그들의 판단과 결정이 옳은지, 전체 공동체의 생명을 해치지는 않는지, 전체 생명에서 소외시키는 부분은 없는지 살피고 생각하고 고민하는, 관계 속의 ‘간’ 역할을 지속적으로 감당해야 하겠다고 다짐한다. 언제든 검은 피가 흐르는 곳을 지적하고, 그 피를 맑히도록 나를 소비하고, 감당이 안 될 정도면 단절을 꾀하면서 관계의 건강을 책임져야겠다. 개인적인 차원의 관계든, 시민으로서 맺는 국가 차원의 관계이든 고민하고 결정하고 책임지는 자유인으로 살아야겠다고 다시 생각한다. 그렇게 건강한 개인이 되고, 살만한 사회를 다듬어서 자녀에게 상속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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