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다상량

잉여

혁명의 원료

by 곤 Gon

호모에렉투스는 이족보행을 통해 ‘손’이라는 잉여신체를 활용함으로써 혁신적인 진화를 하였다. 수렵과 채집 생활을 하던 인류는 정착 생활을 통해 잉여생산물을 맞이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인간 사회에 계급이 등장했다. 이처럼 ‘잉여’의 보편화는 일종의 창조와 혁명을 이룩해 낸다.


나의 어린 시절, 노동에 동원되지도 않고 적절히 부모의 요구에 순응하면 되었던 그 시절엔 잉여시간이 많았다. 잉여시간엔 해가 질 때까지 동네 공터에서 마을 친구들과 놀았다. 망까기(비석치기), 땅따먹기(부동산정복게임) 등 지금은 기억도 가물가물한 창의적인 게임들을 세세한 룰을 만들고 엄격히 따져가면서 진행하며 놀았다. 때로는 ‘깍두기’라는 제도를 통해 어드벤티지를 제공하는 약자 케어시스템을 활용해 가면서 놀이들을 한껏 즐겼다. 그런 게임들을 통해 타협과 협상 능력, 배려, 창조 능력, 자기 절제 등을 배워가며 사회화되어갔다.

외부적 학업의 무게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 자율적으로 시간을 활용할 수 있게 된 대학생 시절, 나의 잉여시간의 대부분은 스노우보딩에 할애되었다. 비시즌에는 ‘헝그리보더’라는 스노우보더 인터넷 커뮤니티에 접속해 지박령처럼 살았다. 그곳에서 다가올 시즌에는 ‘무슨 장비를 갖춰야 할까’, ‘강남 학동 어느 샵에 가면 얼마나 더 장비를 싸게 구입할 수 있을까’ 토론하고 서로 북돋워주며 시즌권 판매 기간을 기다렸다. 유명 보더가 촬영한 라이딩 영상을 어렵사리 다운로드하여 학습하고, 흔들리는 버스에서 손잡이를 놓고 서서 이미지 트레이닝도 했다.

시즌권 판매가 시작되고 스키장이 개장하면 매주 동호회 회원들과 강원도의 휘닉스파크로 향했다. 서로 카빙, 지빙, 하프파이프, 빅 에어에서 점프하고 라이딩하고 자빠지는 모습을 촬영해 주었다. 집에 와서는 싸이월드와 동호회 다음카페를 통해 영상을 공유하고 영상을 보고 또 보며 자세를 교정했다.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체감온도 영하 13도에서도 땀을 흘리며, 리프트 위에서 ‘자유시간’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최선을 다했는데, 아무도 그 대가로 월급을 주거나 자격증을 주지도 않았다. 말 그대로 비효율적으로 시간을 낭비했다. ‘쓸모’없이 내게 주어진 잉여시간을 아낌없이 낭비했고 너무나 행복했다. 그 행복감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그리고 그 이후로 내게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잉여시간을 어떻게 써야 그 행복감을 다시 맛이라도 볼 수 있을까? 너무 목이 마르다.


효율과 소용과 쓸모에 집중된 삶은 잉여시간을 누리는 법을 잊어버리게 했다. 마치 어른이 된 로빈 윌리엄스가 후크 선장과 용맹히 싸우며 네버랜드를 훨훨 날아다녔던 시절을 망각하게 된 것처럼. 그런 의미에서 글쓰기는 요즘 내게 팅커벨의 요정가루이다. 잊어버렸던 행복의 기억을 조금씩 조금씩 소환한다. 그리고 다시 날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나는 어렵사리 확보한 소중한 잉여시간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활용’해야 온전히 행복감을 확보할 수 있으려나. 이 딜레마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효율적으로 낭비하기는 어떻게 가능한가?

사람은 사실 이 잉여시간을 확보하고, 다시 행복을 찾기 위해, 그 자유를 얻기 위해 쓸모와 효율에 그토록 집착하게 되었다. AI를 개발하고 자동화 기계들을 개발한 이유는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어 잉여시간을 되도록 많이 확보하려 함이다. 공리주의적 입장에서라도 인류 과학기술의 발전은 그 과실을 최대 다수에게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 맞다. 한 명이라도 더 잉여시간을 많이 확보하고 쓸데없는데 마음껏 낭비하게 하여 행복의 총량을 높여야 한다고 본다. 시간의 분배정의가 실현되길 바란다.


호모 에렉투스가 잉여신체로 진화의 혁명을 이룩했듯이 우리도 잉여시간의 낭비를 통해 한 단계 더 진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목전에 두고 있다. 이런 생각은 가슴을 뛰게 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 남는 시간에 뭘 하고 있나? 유튜브로 대선 투표율 뉴스를 검색하고, 후보들 관련 가십거리나 찾아 듣고 있네... 쓸데없는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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