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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G HIP Mar 18. 2017

무서운 건 악이 아니다. <살인자의 기억법>

[일.근.후.에]

이 책의 마지막엔 문학평론가의 해설이 있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세계가 무너져 내리는 공포 체험에 대한 기록이다. 그것은 그저 알츠하이머의 증상을 과장하는 것이 아니다. 김영하는 이것을 반야심경의 악몽으로 형상화한다. 반야심경이라니, 그것은 고통과 번뇌에 시달리는 우리에게 깨달음과 평온을 선물하는 불교 가르침의 정수에 해당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악몽이 될 수 있는가.” (157~158p)“<살인자의 기억법>은 세계가 무너져 내리는 공포 체험에 대한 기록이다. 그것은 그저 알츠하이머의 증상을 과장하는 것이 아니다. 김영하는 이것을 반야심경의 악몽으로 형상화한다. 반야심경이라니, 그것은 고통과 번뇌에 시달리는 우리에게 깨달음과 평온을 선물하는 불교 가르침의 정수에 해당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악몽이 될 수 있는가.” (157~158p)


이후에 문학평론가는 반야심경과 사드를 들어 <살인자의 기억법>을 설명한다. 하지만 나머지 해설은 이 글에 싣지 않으려 한다. 우선, 이 속에 소설이 가진 반전과 파괴력을 무용지물로 만들 만한 내용이 실려 있기 때문이고, 평론가이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것으로 가득 차 있어서다. 반야심경과 사드라니. 둘 중의 하나만 이해하기 힘든데 그걸 2개씩이나 대입하다니. 소설보다 어려운 해설을 읽고서 비교적 쉬운, 나만의 방식으로 이 소설에 접근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매에 걸린 한때 살인마 vs 딸을 노리는 젊은 살인마치매에 걸린 한때 살인마 vs 딸을 노리는 젊은 살인마


주인공은 꽤 폭력적인 인물이다. 몇십 번의 살인을 저지르다 어느 순간부터 멈춰버린 살인마. 어울리지 않게도 과거엔 문화센터에서 시를 배우기도 했고, 현재는 딸 하나와 오순도순 살고 있다. 물론(?) 엄밀히 말해 생물학적인 딸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죽인 여자, 문화센터에서 시를 배우다 죽인 여자가 한 부탁으로 그녀의 딸을 데려다 키울 뿐. (이래 봬도 빈말은 싫어하는 살인마) 


운명의 여신은 그런 주인공에게 시련 아닌 시련을 내린다. 자기 집 개도 못 알아보기 시작하는 알츠하이머, 일명 치매에 걸린 것이다. 의사가 알려준 대로 벽에는 포스트잇을 붙이고 목에는 녹음기를 매단다. 그러나 그게 쉽게 되면 소설이 되겠는가. 점차 기억을 잃어가는 자신만 발견할 따름이다. 기억도 나지 않는 새에 딸을 위협하는 지경까지 이르자 딸은 카탈로그를 들고 와서는 한적한 요양원으로 가지 않겠느냐며 말한다. 야속하게도.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신의 동네에 살인마가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리는 주인공. 치매에 걸려도 살인마는 살인마인 듯하다. 그리고 동류를 알아본 주인공은 뒤를 추적하다가 그 살인마가 노리는 대상이 자신의 딸임을 알고 경악한다. (이래 봬도 빈말은 싫어하는 살인마) 젊었을 적에 아무 감정도 없이 사람을 죽였던 주인공은 이제 딸을 지키기 위해 치매 걸린 몸을 이끌고 맞서야만 한다. 이 무슨 ‘테이큰’의 리암 니슨스러운 상황인지. 아니, 그보다 더 안 좋다. 적어도 리암 니슨은 건강하기라도 했으니까.



<이미지 출처 : 구글 검색>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소설 초반은 주인공의 성격을 닮은 짧은 문장들로 쉽게 읽어갈 수 있는 편. 내용도 이해하기에 별 무리 없다. 그러다 감정과 상황은 극에 다다르고, 갑자기 뒤통수를 때리듯 반전은 찾아온다. 기대하시라. 반전은 반전이다. 소설이 마무리되는 방식이 다른 소설과는 달라서인지 온라인상에서는 이 책이 주는 결말에 대해 많은 사람의 의견이 분분한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괜찮았다. 물론 처음에는 그 결말에 적응하는 데에 힘들었지만.


내용을 읽어갈수록 이런 딜레마에 빠지기도 한다. 이 남자를 동정할 것인가, 동정하지 않을 것인가. 이 상황에 공감할 것인가, 공감하지 않을 것인가. 분명히 이 사람에게는 지켜야 할 가족이 있고, 어려운 상황에 부닥쳐있다. 반면에, 이 남자는 몇십 년 동안 살인을 했고, 또 다른 살인으로 앞으로 벌어질 살인을 막으려 한다. 시종일관 차갑고 냉정하게 말하다가 뜬금없이 반야심경이나 여러 철학자의 말을 인용하기도 한다. 마치 살인은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여러 난관(?)에도 어느새 주인공의 상황에 몰입하게 되는 이 소설만의 흡인력은 놀랍기만 하다. 쉽게 읽히다가도 어딘가 모르게 헤매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소설. 무서운 건 악이 아니다. 다른 세계로 푹 빠졌다가 헤어 나오기 힘들 게 만드는 소설 장르만의 매력이다.




소설은 읽는 자의 몫인 듯소설은 읽는 자의 몫인 듯


김영하는 이 전에도 많은 작품을 썼고, 그때마다 많은 주목을 받았던, 몇 안 되는 젊은 작가이다. 팟캐스트도 운영하고 있으며, 여러 독자와 낭독회를 열기도 한다. TV 프로그램에도 출연하는 등 여러 방면에서 독자에게 다가가는 작가이기도 하다. 이 책의 마지막에도 이런 문구로 독자들에게 다가가려 하는 듯 보인다.


“소설가라는 존재는 의외로 자율성이 적다. 첫 문장을 쓰면 그 문장에 지배되고, 한 인물이 등장하면 그 인물을 따라야 한다. 소설의 끝에 도달하면 작가의 자율성은 0에 수렴한다.” (172p)“소설가라는 존재는 의외로 자율성이 적다. 첫 문장을 쓰면 그 문장에 지배되고, 한 인물이 등장하면 그 인물을 따라야 한다. 소설의 끝에 도달하면 작가의 자율성은 0에 수렴한다.” (172p)


<이미지 출처 : 구글 검색>


그가 운영하는 팟캐스트에서도 그는 “소설이란 제일 처음 문장을 쓰고, 그다음 문장을 이어가면 되는 것이다”라는 말을 줄곧 한다. 작가의 이런 솔직한 말들이 훨씬 좋다. 소설은 이렇게 쓰는 것이라고. 나는 이렇게 작품을 쓴다고. 어려운 말들을 늘어놓으며 해설하는 게 멋있어 보이긴 해도 공감이 갈까. 결국, 소설은 읽는 자의 몫인 듯하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읽는 자의 몫을 한층 업그레이드해주는 소설이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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