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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G HIP Mar 18. 2017

위대한 낭비에 도전하는 약자들, <끝나야 끝난다>

[일.근.후.에]


일본에는 고시엔(甲子園)이라 불리는 고교 야구 대회가 있다. 4,000개 이상의 고교 야구팀이 지역 예선을 거친 다음에 프로팀 한신 타이거스의 홈구장, 고시엔에 모여 토너먼트를 치른다. 일본은 고교 야구의 인기가 프로 야구의 그것만큼 대단해서 학교 전체가 응원하러 오거나, 스포츠 채널에서 TV 중계도 해준다. (고교 야구에 인기라고 할 만한 것이 거의 없는 우리나라와 사뭇 다른 광경이다) 패기 넘치는 선수들, 열성적인 응원단, 뜨거운 승부와 승패의 갈림길. 그래서인지 일본 소설이나 만화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소재가 바로 이 고시엔이다. 

예선에서 탈락하면 이렇게 울며 고시엔 구장의 흙을 퍼간다고 한다. 
이 때문에 유지비용이 많이 든다고. (출처 : 구글 검색) 


책 <끝나야 끝난다>에 등장하는 가이세이고도 고시엔에 도전하는 수많은 고등학교 중 하나이다. 근데 어딘가 좀 다르다. 매년 동경대에 가장 많은 학생을 보내면서 야구를?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대 합격률이 제일 높은 학교에서 야구를, 그것도 고시엔에 도전하겠다고 하니 ‘하던 대로 공부나 할 것이지’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작가인 다카하시 히데미네는 왜 이런 학교를 취재했을까. 더 놀라운 건 이 책이 일본에서 출간 즉시 30만 부를 돌파하며 베스트셀러에 올랐다는 점이다. ‘별난 수재들의 고시엔 도전기’라고만 하기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는 건 분명한 듯하다. 


고등학생들이 스포츠를 한다면 보통의 줄거리는 이렇다. 머리가 나쁘지만, 의욕은 넘치는 남자 주인공. 남자 주인공이 한눈에 반할 만큼 예쁘장한 여자 주인공. 남자 주인공은 항상 라이벌과 승부를 가리게 되고, 결국 여자 주인공과 승리를 모두 거머쥐게 된다는, 뭐 그런 이야기.


이 책엔 그런 것 따위 없다. 가이세이고의 야구부원들은 냉정하리만큼 철저하게 본인들이 약자라는 사실을 인식한다. 심지어 감독까지도 말이다. 그래서 남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경기에 임한다. 일거에 대량 득점을 의식한 타순이나 ‘하이-리턴, 노-리스크’ 전략 등이 그러하다. 여기에 9회 말 2아웃에서 과감하게 풀스윙을 하는 것도 승리의 가능성을 최대한 높일 수 있는 ‘약자의 전략’ 중 하나. 책에 등장하는 대부분이 이렇다. 결코, 일반적인 야구에서는 볼 수 없는 전략들이다. 가이세이고의 야구부원들은 자신들을 ‘약자’라고 인정한 순간부터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그들만의 야구를 하게 된 것은 아닐지. 


사실, (책에서 나온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고등학교 때의 야구부 활동은 ‘위대한 낭비’이다. 그렇다. 누가 알아주겠는가. 프로로 진출하지 않는다면, 고교 운동부 경력은 술자리를 흥겹게 만들어주는 좋은 안줏거리 그 이상은 되지 못할지도 모른다. 작가는 이 생각에 가이세이고 감독의 말을 인용하여 반박한다.

“쓸데없기 때문에 마음껏 승부에 매달리라는 것입니다. 가위바위보 놀이와 같습니다.” (107p)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되지 않는다는 건 치명적인 단점이다. 말 그대로 ‘낭비’이다. 그러나 쓸데없어 보이기에, 아니 정말로 쓸데없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다면 그걸로 ‘위대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와중에 야구부원들은 야구에 대한 객관적인 시선을 놓치지 않는다. 작가가 취재하는 학생들은 고시엔 진출이 힘들다고 말하지만, 어떻게 하면 투수가 던진 공을 정확히 맞힐 수 있는지 연구한다. (책을 읽다 보면 ‘이래서 공부를 잘하는 거구나!’ 싶다) 객관적으로 현 상황을 바라보면서 고시엔에 진출할 가능성을 높여줄, 또 하나의 가능성을 만드는 것. 치열한 일본 고교 야구의 틈바구니에서 그들이 찾은 그들만의 야구가 바로 이런 모습이었다. 


책을 보면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구절이다. (출처 : 직접 촬영)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특히 추천한다. 야구를 잘 모르더라도 새로운 방식의 위안이 필요하다면 추천하고 싶다. (야구를 보면서 안타 치고 나서 왜 왼쪽으로 돌지 않고 오른쪽으로만 도느냐고 생각하는 분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이 책이 별난 수재들의 고교 시절 추억담이 될지, 새로운 시각의 발견이 될지는 분명 독자 개인의 몫이겠다. 그래도 책을 읽고 나서 야구뿐만 아니라 삶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건 분명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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