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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G HIP Mar 18. 2017

B급 감성

[은밀한 절망, 발칙한 몽상]

아홉살 무렵, 엄마는 내게 조심스레 어려워진 집안 사정을 설명하며 몇 달 간 학원에 보내주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 그래도 이해해줄 수 있냐는 엄마의 물음에 담담하게 알겠다고 대답했던 때, 나는 내가 철이 다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 날 이후, 대학 입시를 치를 때까지 나는 사교육을 대할 때마다 늘 불편했다. 학원에 가기보단 값싼 인터넷 강의를 찾아 들었다. 이런 나의 발품팔이식 입시 준비는 집안 사정이 실제적으로 나아지고 말고와는 크게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분명한 것은 내겐 소위 '강남 엄마'들이 가진 정보력도 없었고, 말로만 듣던 '할아버지의 재력'이 뒷받침해주는 것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시절 나는 대학 입학을 포함해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있었지만, 적어도 거대한 사교육 시장의 카르텔의 희생양이라는 피해의식은 없었다. 내신은 최상위권이었지만 모의고사 점수는 기대처럼 오르지 않았던 건 그저 나의 부족함 탓이라고만 여겼다. 또, 입시 논술을 제대로 교육받은 적이 없었기에 나의 글은 언제나 나르시즘적 사유와 화려한 수사들로 가득했다. 그러한 나의 답안을 대학에서 왜 뽑아주지 않았는지, 수업 한 번 당 15만원씩 내고 논술 사교육을 받지 않은 학생에게서 정제된 글이 나오기란 얼마나 어려운 건지, 취업준비생 시절 대치동 논술학원에서 학생들의 글을 첨삭해주는 일을 해보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논술도 훈련이라는 것을, 또한 입시 시장에서 효율적인 훈련을 받기란 자본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이다.


우여곡절 끝에 (기대와는 다른) 대학에 적당히 입학하고 나서 졸업할 때 까지, 나는 나의 계급 정체성에 대해 많은 변화와 혼란을 겪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환경과 새롭게 만난 사람들의 환경이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이었다. 캠퍼스 안팎에서 함께 웃고 떠들었던 친구들, 그 중 상당수는 나와 다른 배경에서 성장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신입생 무렵엔 미처 지각하지 못했다. 그 때까진 아직 내가 살고 있는 사회와 체제에 대한 깊이 있는 고찰을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교수님께서 입이 닳도록 추천했던 리영희 책을 일찍이 거들떠보지 않았던 탓도 분명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나의 고민은, 취업 준비를 시작할 무렵 비로소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이력서에 부모님의 '학력' 란을 채울 때면─그것들이 실제 취업과 하등 관련 없는 항목이었을지라도─그깟 대학교 하나 졸업하지 않은 부모님이 원망스러웠다. 넓고 높은 사회의 벽 앞에서 화려한 인맥도, 자본도, 빽도 없는 자신이 싫었다. 대졸자 부모님 밑에서 자라난 친구들 앞에서 나는 종종 열등감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아홉살 무렵 철이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나이를 먹을수록 반대로 철이 없어지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학창시절엔 사교육 없이도 보란듯이 성공해보이겠다던 아이가, 스무살이 넘어서 오히려 가정환경, 성장배경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으니 그렇게 생각될만도 했다. 





이처럼 무언가를 깨달을 때면, 언제나 나는 선두에서 조금 뒤처져 한 발 늦게 걷고 있었다. 한번도 나를 위해 저절로 만들어진 길은 없었다. 위태롭게 만들어진 살얼음판을 걸으면서도 당장 내 앞에 놓을 길을 걱정해야 했다. 돌아보면 나는 한번도 '정상적인 주류'에 속했던 적이 없었다. 특출난 수능 성적으로 'SKY'에 들어간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입학과 동시에 전액 장학금을 받은 것도 아니었으며, 어떠한 가치관이나 학문공동체에 뜨거운 연대성을 느끼지도 못했다. 이러한 환경은 내 'B급 감성'의 토대가 되었다. 그 어떠한 계급이나 집단에도 온전하게 속하지 못하는 경계선에서 메이저도 마이너도 아닌 중간자적 입장을 견지하는 나의 특수한 위치 말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B급 감성이 지닌 '욕망'은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언제나 내 안에는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 있어서, 그것을 채우고자 치열하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이는 반드시 "반드시 주류가 되겠다"는 A급 감성과는 다른 종류의 무엇이었다. 그러다보니 늘 최대한 많은 정보를 찾아보고 정리하고, 또 이를 스스로 반복적으로 상기시키는 것은 하나의 습관이 되어버렸다. 비록 용의 꼬리가 되진 못했지만, 내가 택한 학문의 특수성을 이용해 나만의 영역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졸업할 때까지 나의 등록금 고지서에는 '0원'이 찍혀있었다. 


여차저차 일본에 있는 대학원에 진학을 앞두고 있는 현재에도, 나는 여전히 B급이다. 국공립대가 아닌 도쿄의 한 사립대에 입학하게 되었고, 일본 유학생이면 누구나 선망하는 '문부과학성 장학생'이 아니라 사비 유학생으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누군가가 내게 그랬던가. 부모님께는 조금의 '부채의식'을 느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어쩌면 지금껏 잡지 못하고 놓쳐버렸던 수많은 기회들에 대해서, 은연중에 타고난 환경 탓을 하고 있던 나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일지도 모른다. 실제 부모님께 지원을 받아 입학금과 등록금을 일본으로 송금하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학창시절 입시 학원에 들이지 않은 돈, 학부 4년 간 굳혔던 대학 등록금이 한꺼번에 소비되어버리는 기분이었달까. '어긋난 계급의식'에 사로잡혔던 나에게 '건전한 부채의식'을 선사하는 귀중한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타고난 계급을 형성해준 것은 부모님이지만, 그 속에서 또 다른 'B급 감성'을 만든 것은 나 자신이다. 타고난 계급을 벗어날 수 있는가를 고민하기에 앞서, 이러한 계급의식을 인지하고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이방인으로 몰아세운 것 또한 나 자신이다. 그러한 이유로, 나는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또 치열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아마도 그 속에서 나는 또 성장하고 한 걸음 나아갈 테지. 본래 주어진 것이라곤 없었던 것처럼, 나는 또 나만의 새로운 길을 만들기 위해 걸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치명적인 외로움을 맞닥뜨리는 것은 어쩌면 B급 감성의 소유자로서 피해갈 수 없는 숙명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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