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광고인 김종섭 Oct 27. 2022

남의 아이디어에 숟가락을 얹어라

무에서 유를 창조하지 않기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것이 없나니


전도서 1:9


그렇다. 해 아래에는 새것이 없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이미 신이 창조해두셨다. 물, 바람, 해, 땅, 식물 등이 그 증거이다. 하지만 창작가가 되는 순간 우리는 신으로 빙의하게 된다. 세상에 없던 그 무언가를 창조하려 한다. 창작이 아닌 창조를 하려는 순간 창작가로서의 삶은 끝나고 만다. 신이 만든 창조물을 이겨낼 수가 없다. 그렇다면 창작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언젠가 뉴욕에서 광고회사를 다니는 미국인들의 습성에 대해 들을 기회가 있었다. 내일까지 아이디어를 준비해서 만나자고 하면 다음날 아무런 아이디어 없이 출근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와 사뭇 달랐다. 그래도 우리는 회의 시간 본인 차례가 왔을 때 입 뻥긋할 아이디어 하나쯤은 준비한다. 내가 들은 미국 광고인들은 아무런 아이디어 없이 남이 말한 아이디어를 듣다가 거기서 숟가락을 얹어 자신의 의견을 제안한다는 것이다. (물론, 소수의 경우일 것이다. 뉴욕의 소수 광고인들을 보고 모든 미국 광고인들이 그럴 것이다고 가정할 수 없다.) 


이런 말을 하기는 싫지만 굉장히 스마트한 전략이다. 어쩌면 그것이 더 좋은 아이디어를 제안하기 위한 최고의 방법일지 모른다. 왜냐면 아이디어는 내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그림을 처음 보는 사람이 있을까? 너무나 유명한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이라는 작품이다. 나는 이 그림을 보는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외국엔 이삭 줍는 여인이 있구나.

 한국엔 박스 줍는 여인이 있는데...'


그리고 곧장 실행에 옮겼다. 실제로 우리 집 앞에는 박스 줍는 할머니가 사셨다. 광고를 만들겠다는 열정이 너무 지나친 나머지 할머니 댁에 초인종을 누르고 인터뷰까지 하려 했다. 그때는 그것이 무례한 행동이라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무조건 광고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할머니, 이 박스 주우시면 얼마나 버세요?"


무례하고 상처가 될 말을 쉽게 뱉어버렸다. 나를 아래 위로 훌터보시더니 아니나 다를까 할머니의 불호령이 떨어지셨다. 알고 보니 할머니가 화를 내신 이유는 나의 무례함 때문이 아니었다. 그때는 내가 백수생활을 전전하던 때라 통장에 30만 원도 없던 거지였다. 당연히 나의 행색은 초라했고 할머니는 나를 경쟁 상대로 보셨던 것이다. 아무리 내 꼴이 형편없었지만 박스 줍는 청년으로 보이다니...


"자네 같은 젊은이조차 이 일에 뛰어들면 나 같은 노인은 뭘 먹고 사노..."


나는 강한 어조로 할머니께 경쟁 상대가 아니라고 밝혔다. 어려운 환경의 노인들을 돕기 위해 온 광고인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찡그린 미간을 푸시며 할머니는 이내 마음의 문을 여셨다. 


"경기 좋을 땐 120원까지도 쳐주는데 요즘은 70만 원 밖에 못 받아..."


충격이었다. 할머니 집 앞 리어카에 가득 쌓은 박스가 팔아도 몇천 원 밖에 되지 않는다니 말이다. 그렇게 할머니와의 인터뷰를 토대로 나는 광고를 만들어갔다. 

내가 만든 광고이지만 사실 내가 한 것은 별로 없다. 밀레라는 뛰어난 예술가의 작품을 보고 숟가락 얹힌 것이 전부이다. 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아이디어는 내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다. 


언젠가 초등학교에 가서 창의성 강의를 한 적이 있다.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 그림을 보여주면서 물었다. 


"여러분은 이 그림으로 광고를 만들면 어떤 걸 만들 거예요?"


그랬더니 한 학생이 우렁찬 목소리로 "스크린 골프장이요!"라고 소리쳤다. 가장 오른쪽 여인의 포즈가 골프를 치는 것 같단다.


밀레는 이삭 줍는 여인을, 

나는 박스 줍는 여인을,

초등학생은 골프 치는 여인을 봤다.


이것이 바로 광고가 재미있는 이유다.

그림 한 장을 두고 모두 다른 생각을 한다.

그림 한 장을 두고 모두 다른 아이디어를 발견한다. 


아이디어를 발견하려면 자신만의 확고한 숟가락을 가져라. 그리고 그 숟가락으로 타인의 생각에 얹는 걸 두려워하지 마라. 그 아이디어 역시 누군가의 아이디어에서 발전시킨 것에 불과하다. 




작가의 이전글 광고에서 쓰면 안 되는 언어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