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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Jan 09. 2020

환상을 사실로 만드는 이미지의 마법

<겨울왕국 2>가 단순한 서사에도 불구하고 매혹적인 이유 


 송경원 사진제공 월트디즈니코리아     





<겨울왕국 2>는 누가 보러 가는 걸까. 1200만 관객(2019년 12월 21일 기준)을 동원한 영화를 두고 하기엔 바보 같은 질문이다. 하지만 일종의 문화 현상에 가까웠던 전작에 비해 평단의 평가는 물론 파급력도 덜한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울왕국 2>는 결국 올해, 아니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승자가 됐다. 2014년에 개봉한 <겨울왕국>은 천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한국에서 개봉한 애니메이션 중 역대 흥행 1위의 자리에 올랐었다. 2위가 500만 관객이 관람한 <쿵푸팬더 2>(2011)였고 국내 장편 애니메이션 중 최고 흥행작이 220만 관객을 동원한 <마당을 나온 암탉>(2011)이었으니, <겨울왕국>은 사실 상 애니메이션 시장과는 구분되는 별개의 독특한 신드롬이었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일 것이다. 1편이 전무후무한 성적을 거뒀으니 속편이 흥행하는 거야 예상된 결과지만 <겨울왕국 2>가 설마 1편을 훌쩍 뛰어넘어 역대 애니메이션 흥행 1위를 갈아치울 줄은 몰랐다. 이미 흥행한 작품을 두고 왜 흥행했는지 분석하는 것만큼 의미 없는 짓도 드물지만 5년 만에 다시 찾아온 <겨울왕국 2>의 성공은 한번 되짚어볼 가치가 있다. 이 글은 ‘흥행공식’이란 이름의 환상의 섬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애니메이션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하는 모험이다. 그 섬에 굳이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차라리 ‘애니메이션의 마법’이라고 해두자.     


어린이에게도 어른에게도 통하는 마법

2019년 한국장편 애니메이션 시장은 고립된 섬과 같다. 간혹 100만 혹은 300만까지 가는 작품도 있지만 그건 대개 <토이 스토리 4>처럼 북미의 대형 스튜디오의 작품일 경우에 해당한다. 이 작품들은 극장용 애니메이션이라기보다는 내러티브 상업영화라는 카테고리로 묶인다고 보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예를 들면 이들 작품은 디즈니의 실사영화 <알라딘>이나 마블의 수많은 슈퍼히어로 영화들, <분노의 질주> 시리즈 같은 영화들과 경쟁한다. 반면 전통적인 애니메이션 시장도 분명 존재한다. 아동, 가족 관객들을 공략하는 극장 애니메이션 시장은 2010년대 중반부터 꾸준히 성장하여 안정적으로 자리 잡았다. 여름, 겨울 방학을 성수기로 했던 애니메이션 시장은 이제 1년 내내 상영하는 체제로 바뀌었다. 비결은 수많은 중저가 수입 애니메이션 덕분이다. 시기에 관계없이 아동 관객들을 공략하는 중저가의 수입 애니메이션들은 대략 2,30만 명을 목표로 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웬만한 예술, 다양성영화들보다 훨씬 안정적인 시장이다. 이들 작품들의 특징은 명확하게 아동을 타깃으로 한다는 점이다. 소위 말해 어른들도 재밌게 볼 수 있는 작품과는 살짝 결이 다르다. 디즈니의 야심작인 <겨울왕국 2>는 두말할 것도 없이 큰 규모의 내러티브 상업영화에 속한다. 하지만 <겨울왕국 2>를 첫 관람했을 때 전작보다 대상 연령대를 한층 낮춰 잡았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그게 재미있는 포인트였다.


뒤늦게 주변의 반응들을 듣고 나서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됐다. <겨울왕국 2>는 1편에 비해 대상 연령층이 다소 높은 것처럼 보인다는 게 대부분의 반응이었다. 핵심적인 이유는 아이들이 보기엔 무섭다는 반응이 꽤 있었다는 것이다. 메인 테마인 ‘숨겨진 세상’의 멜로디는 아련하게 들려오는 허밍 소리로 작품 전반에 깔려 있는데 어디서 들려오는지 알 수 없는 이 소리가 아이들의 공포심을 자극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말이 되는 분석이다. <겨울왕국 2>은 엘사와 안나가 잊힌 과거를 찾아 숨겨진 세상으로 찾아가는 이야기다. 서사의 동력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에 대한 궁금증인데, 그 호기심은 곧 불안감과 연결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신비로운 노랫소리는 한편으로 미지에 대한 공포를 자극할 수 있다. 공포심은 엘사가 숨겨진 섬을 찾아 바다를 건너기 위해 물의 정령과 사투를 벌이는 장면에서 정점을 찍는다. 밤바다는 본래 심연의 공포를 자극하는 이미지인데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닷속에서 벌어지는 엘사와 물의 정령의 대결은 실은 꽤 많은 부분에서 공포영화를 연상시킨다. 아이들이 그 장면에서 무서움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다. 


거꾸로 나의 호기심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왜 나는 <겨울왕국 2>를 보자마자 아동용이라고 ‘착각’을 했을까. 생각해보면 <겨울왕국> 1편의 팬들을 고스란히 이어받으려면 당연히 연령대도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때 초등학생들이 5년이 지나 이제 고등학생이 되었을 테니, <겨울왕국 2>를 처음 접하는 아동 관객 이외 1편의 팬들을 위한 눈높이 조정은 상식적인 일이다. 하지만 나는 <겨울왕국 2>를 보고 10분도 채 되지 않아 이게 아동용이라고 단정해버렸다. 이유는 간단하다. <겨울왕국 2>의 이야기 전개가 상당히 단순하고 직관적이기 때문이다. <겨울왕국 2>가 보여주는 패턴은 아동 타깃의 극장 애니메이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검증된 공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아렌델 왕국을 평화롭게 다스리고 있는 엘사와 안나의 현재 생활이 나온다. 전작에서 마법의 힘을 받아들인 엘사는 당장의 행복을 소중히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 여전히 불안하다. 곧이어 어린 시절 부모님께 전해 들었던 전설이 다시 떠오르고 기다렸다는 듯 엘사에게만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무릇 이야기는 갈등과 함께 시작되는 법, 영화는 잊힌 전설과 마법을 소재로 엘사와 안나를 다시 모험의 세계로 이끌고 간다.      


최소한의 이야기에 최대한의 볼거리

<겨울왕국 2>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무난하다. 익숙하고 보편적이라는 말은 반대로 모두가 부담 없이 즐길 만한, 검증된 이야기라는 뜻이기도 하다. 1편에 비해 단조롭다는 평도 있지만 이야기의 완성도 자체는 엇비슷하다고 본다. 사실 <겨울왕국> 1편도 인물의 위치 설정이 참신했던 거지 이야기 자체는 새롭고 기발하다고 보기 어려웠다. 다만 그럼에도 이 작품이 연달아 우리를 매료하는 건 이야기가 아닌 볼거리, 정확히는 뮤지컬적인 요소 덕분이다. <겨울왕국> 1, 2편 모두 이야기의 익숙함을 뛰어넘을 만한 스펙터클을 보여준다. 어쩌면 스펙터클에 무게중심이 갈수록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단순해야 할 필요도 있다. 최소한의 이야기에 최대한의 볼거리. 그것이 뮤지컬 애니메이션 <겨울왕국 2>의 핵심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요소를 감안해도 <겨울왕국 2>의 스토리는 1편에 비해 훨씬 1차원적이다. 정확히는 이야기가 단조로운 것이 아니라 사건 전개, 캐릭터의 리액션이 단조롭다. 


아동 애니메이션의 특징 중 하나는 사건과 반응을 단순화시킨다는 데 있다. 캐릭터가 상황에 반응할 때 고뇌의 과정은 최대한 생략하고 즉각 반응을 내놓는 게 중요하다. 가령 뽀로로가 어떤 행위를 할 때 개별 장면에서 매번 ‘왜’를 묻지 않는다. 뽀로로는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기도 하지만 그건 순차적인 행동들의 결과이지 한 장면 안에서 복잡한 심경을 담진 않는다는 말이다. <겨울왕국 2> 역시 복잡한 감정을 복잡하게 담아내지 않는다. 엘사의 불안은 초조, 공포, 안타까움 등 여러 감정이 뒤섞인 복합적인 감정이 아니라 ‘불안감’이라는 매우 정확하고 단편적인 상태로 묘사된다. <토이 스토리 4>와 비교해보자. 카우보이 장난감 우디는 늘 아이에게 최우선이었던 자신의 자리가 밀려나는 현재의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욕심을 앞세우지 않고 아이에게 최선이 무엇인지를 고민한 후 행동한다. 행동하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씁쓸함이 남아 있다. <토이 스토리 4>에는 짧은 장면에도 우디의 이러한 복잡한 심경이 복합적으로 담겨 있다. 몇 마디 단어로 단정하기 어려운 감정적인 여운이 매 장면이 묻어나고 애매모호한 표정으로 표현되어 결과적으로 캐릭터의 두께를 만들어준다. 우디가 입체적인 캐릭터가 될 수 있는 건 감정의 복잡다단함과 망설임의 순간들이 매 장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 <겨울왕국 2>의 엘사와 안나의 행동 방식은 실로 1차원적이다. 이건 수준과 차원의 문제라기보다는 전달 방식의 차이다. <겨울왕국 2>는 이야기 전개에 있어 인물들의 단순한 리액션들을 쭉 나열하는 데 그친다. 사건과 상황을 제시할 뿐 시간을 들여 감정적으로 설득하진 않는 것이다. 그렇게 <겨울왕국 2>에서 아동용 애니메이션의 패턴들을 마주하며 이 영화의 눈높이가 상당히 낮게 설정되어 있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실은 거기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서사의 헐거움은 음악과 춤이라는 뮤지컬의 형식, 그리고 직관적인 볼거리로 충분히 메우고도 남기 때문이다. 여기서 질문을 조금 확장해보자. 왜 <겨울왕국 2>는 전 연령층에 먹히고, 여타 국내 창작 애니메이션들은 아동 관객 이외에는 외면받는가. 성인 관객들까지 모두 아우르기엔 <겨울왕국 2> 역시 내러티브의 단순함과 헐거움에 대해 지적받을 수밖에 없다. 주제적으로는 시의성을 반영하여 한층 성숙해졌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 전달 방식은 이미 모두가 아는 정해진 답으로 단조롭게 끌고 가는지라 이야기의 활력마저 함께 깎아먹는다. <겨울왕국 2>는 감정을 설명, 설득하지 않고 그저 ‘보여주고 들려주는’ 방식으로 제시하는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울왕국 2>가 재미난 이유가 무엇일까. 답은 간단하다. ‘보여주고 들려주는’ 방식의 완성도가 현재 구현 가능한 거의 모든 기술의 정점에 있기 때문이다.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마법을) 보여주고 (노래를) 들려주는 걸로 이미 충분하다. 관객은 물량 공세로 완성한 최상의 비주얼에 말 그대로 강타를 당한다.   

   

자본과 기술이 선사하는 스펙터클

<겨울왕국 2>의 작화 디테일은 상상을 초월한다. 같은 이야기를 프레임 수를 낮추거나 움직임이 조금이라도 덜 매끄러웠다면 전혀 다르게 다가왔을 것이다. 확대해보면 캐릭터의 솜털 방향까지 묘사되어 있고, 심지어 엘사의 눈동자에 투영된 눈앞의 이미지마저 그려낸다. 영화가 빠르게 전개될 땐 인지하지 못할 정보들까지 그야말로 현실을 뛰어넘는 정보량으로 화면 위에 재현되어 있는 것이다. 안개와 눈, 불과 바람처럼 부정형의 이미지를 표현한 방식도 탁월하다. 특히 엘사와 물의 정령이 추운 바다 위에서 대결을 벌이는 장면의 스펙터클은 그야말로 실제 겨울바다 한가운데 있는 것보다 더 생생한 쾌감을 안긴다. <라이온 킹>(2019) 실사 버전까지 만들어낸 디즈니의 기술력이야 두 말할 것도 없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방향성이다. <토이 스토리 4>가 장난감의 세계를 지향하고, <라이온 킹>이 사진보다 더 사진 같은 이미지를 재현했다면 <겨울왕국 2>의 목적지는 환상과 마법의 세계다. 물, 바람, 불, 얼음의 움직임들이 눈앞에서 뛰어노는 환상적인 이미지. 실사로는 구현하지 못할 그 역동적이고 다채로운 움직임을 영화는 실제로 만들어버렸다. 디즈니는 어떻게 이런 환상적인 이미지를 창조해내는가. 그 비결은 굳이 전문적인 기술 해설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마법의 이름은 다름 아닌 자본력이다. 


애니메이션의 마법은 존재하지 않는 것, 상상으로만 가능한 것을 그려낼 수 있다는 데 있다. 영화의 역사는 그렇게 스크린 위의 세계에 실감을 부여하는 방법들을 고민하고 창조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그중 대표적인 발명품이 다름 아닌 내러티브다. 우리는 ‘이야기 방식’을 통해 존재하지 않는 대상에 공감을 느끼고 그것이 진짜라고 믿는다. 말하자면 애초에 이야기는 (실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족한 이미지와 소리, 즉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을 보완하는 장치 중 하나였다. 이미지가 덜 생생하고, 실제와 다소 차이가 있더라도 이야기와 상상력을 통해 빈 칸을 메워가며 환상의 세계를 창조해온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우리는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 즉 창조된 이미지가 실제를 압도하는 세계에서 살고 있다. <겨울왕국 2>의 단조로운 서사를 마주하며 거꾸로 이미지의 위력을 실감했다. 


기술은 이미 우리의 지각을 한참 앞서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문제는 그것을 집약할 수 있는 기획과 자본력이다. <겨울왕국 2>는 디즈니가 마음먹고 마법을 부렸을 때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는지 보여준 결과물이다. 이 같은 자본 집약적인 결과물의 현 주소는 실사 영화가 아닌 애니메이션이기에 더욱 노골적이고 선명하게 읽어낼 수 있다. 이렇게 편편한 캐릭터, 단순한 이야기, 익숙한 전개에도 불구하고, <겨울왕국 2>는 재미있다. 다 아는 걸 보여주고 들려주는데도 눈과 귀가 즐겁다. 그럴 만한 완성도로 그렸기 때문이다. <겨울왕국 2>의 장면들은 이야기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스펙터클한 순간들을 선사한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자본의 힘으로 이뤄낸 압도적인 작화와 디테일 덕분이다. 나는 <겨울왕국 2>를 보러 간 사람들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고 온 게 아니라 신기한 구경거리를 보고 신나는 공연을 즐기고 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쩌면 그건 다가올, 아니 이미 당도한 영화의 미래일지도 모르겠다.          


송경원

<씨네21>기자, 영화 평론가. 좋은 글쓰기에 대해 늘 고민한다. 

고양이 두 마리와 영화 평점에 까다로운 동거인과 함께 산다.     


위 글은 빅이슈 1월호 218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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