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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Jan 16. 2020

[서울게이행복주택] 홍제천에서 산책하는 방법


 정규환 

사진 김찬영     





“어머~ 이 아가는 몇 살이에요?” 

“열두 살이에요.”

“정말요? 두 살이라고 해도 믿겠어요.”


새하얀 눈처럼 뽀얀 털, 그리고 뾰족한 주둥이와 쫑긋한 귀를 가진 스피츠 흰둥이. 처음 이 아이를 보고 애니메이션 <짱구는 못말려>의 그 ‘흰둥이’밖에 떠오르지 않아 그렇게 부르다 세상 직감적인 이름이 되어버렸다. 흰둥이의 동안 외모를 뽐내며 사람들과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다 보면 마치 자식 자랑을 하는 팔불출이 된 듯해 속으로 ‘자제하자’라고 되뇐다. 하지만 이미 인스타그램 피드는 흰둥이 사진으로 도배된 지 오래. 사람들을 만나도 “깡충깡충 뛰는 것 좀 봐, 예쁘지?”라며 흰둥이의 모습이 담긴 스마트폰을 들이민다. 반려동물을 키우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우리 애도 그래요”라며 공감 넘치는 대화가 계속 이어진다. 열두 살 된 노견 흰둥이를 보호하고 있는 요즘 일상이다.


우리가 흰둥이와 함께 산책하는 모습은 다소 특이하다. 흰둥이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앞을 보며 걷는 게 아니라 한 줄로 행진하듯 걷는다. 흰둥이는 내 왼쪽 발을 따라 걷는 게 습관이 되어서 만약 애인이 내 옆에서 줄을 잡으면 빙글빙글 돌고 만다. 그래서 내가 맨 앞에 서고 가운데 흰둥이가 있고 맨 뒤에서 그가 줄을 잡고 따라오는 모양새다. 그게 우리가 찾은 최선의 산책 방법이다. 나는 애인에게 리드줄을 맡긴 채 대화 없이 앞만 보고 걸어도 행복함을 느낀다. 과거엔 이런 풍경을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꼬물꼬물 태어난 지 한 달 정도 된 아기 흰둥이를 아버지 친구분으로부터 입양한 게 2008년 4월의 일이다. 그렇게 쭉 가족들과 함께 살다가 2016년 내가 애인과 동거를 위해 독립을 한 뒤로 흰둥이와 떨어져 살게 됐다. 그사이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흰둥이의 존재는 내 인생에서 희미해져갔다. 본가에 가는 횟수만큼 흰둥이를 만나는 데 때로는 한 달, 두 달이 걸리기도 했다. 그렇게 흰둥이의 시간은 야속하게도 열두 살의 할아버지로 이끌었다. 독립을 하고 자유롭게 살다 보면 여러 부채의식을 종종 느끼기 마련인데, 마치 부모님에게 자주 전화드려야겠다고 다짐하는 출가한 자식의 마음이 흰둥이에게도 비슷한 무게로 쓰였다.


최근 곤히 잠자는 시간이 길어진 흰둥이. 이제는 박수 소리 정도만 알아들을 정도로 청력을 잃었다는 걸 깨달았다. 예전엔 아버지의 자동차 엔진 소리만 듣고도 현관문으로 뛰쳐나오던 흰둥이가 이제는 귀가해도 현관문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조금 서운했었다. 처음엔 귀찮아서 그런가 보다 했다. 노화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이렇게 준비 없이 찾아올 줄이야. 흰둥이가 새근새근 자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생각한다. 쫑긋한 귀 탓에 예민해서 잠은 푹 자는지 걱정할 정도였는데 이제는 주위 신경 쓰지 않고 푹 잘 수 있겠구나. 서글픈 감정이 들다가도 여전히 아기 같은 얼굴을 한 이 생명을 앞으로도 잘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성소수자들에게 반려동물은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는 존재

그렇게 우리 곁으로 요양 온 흰둥이는 연애 6년 차의 일상을 많은 부분 바꿔놓았다. 단조로운 삶 속 일을 하고, 퇴근 후 저녁을 먹고, 주말에 가끔 친구들을 초대하면서 매너리즘에 빠질 찰나. 집에서 기다리는 흰둥이를 위해 불필요한 약속을 줄여나갔다. 여가 시간엔 가능한 집에서 라디오 청취나 독서 같은 실내 활동을 한다. 매일 홍제천에서 산책을 시키면서 휴식을 함께할 수 있는 ‘펫 프렌들리’ 카페에 가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동시에 평생 반려동물을 키워본 적이 없는 애인에게 부담이 되지는 않을까. 혹여나 ‘남편의 자식’ 같은 느낌이진 않을까.(사실은 모셔야 하는 시아버지인 줄도 모른다.) 하는 걱정은 잠시, 흰둥이는 새로운 환경에 금방 적응했고, 애인도 간식과 특유의 손 마사지로 흰둥이와 친밀함을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동거 게이 커플에게 반려동물은 어떤 의미일까.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주위만 둘러보아도 반려동물을 키우는 성소수자 가구들이 참 많다. 특히 고양이의 비율이 높다. 밴드 퀸의 프레디 머큐리가 평생 사랑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했던 반려 고양이들처럼, 반려동물은 오랜 시간 성소수자 가족의 일부가 되어왔다. 우리 역시 흰둥이를 보살피며 돌봄의 욕구를 해소한다. 두 사람의 관계에 안정이 찾아오면 자연스레 누군가에게 사랑을 나눠주고 싶기 마련이다. 평등하게 돌봄을 수행하면서 우리 관계도 돈독해지고, 아이 보는 재미에 산다는 말이 이해 갈 정도로 어느새 삶의 중요한 의미를 발견했다. 


“흰둥아 너는 요즘 행복하니? 1년 전 네 사진들을 보면 문득 놀라. 내게 짧았던 1년이 너에겐 어떤 속도인지 감이 안 와서 말이야. 이렇게 한 해, 두 해 보내다 보면 언젠가 네가 무지개다리를 건너는 날이 오겠지. 그 순간 네 옆을 꼭 지켜줄 거라고 약속할게. 사랑해”


흰둥이는 교집합 가족이다. 여전히 내 혈연가족 안의 반려동물이지만, 앞으로 우리 커플의 가족이 될 여지가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어느새 나보다 더 늙어버린 강아지가 내게 주는 축복이자 작은 희망이기도 하다. 다른 의미를 또 발견하기까지, 그때까지 흰둥이가 행복하게 오래도록 살기를 바란다.          


홍제천을 좋아하세요?

사람도, 동물도 사랑하는 서대문구 홍제천 길 따라 반려동물 친화적인 카페들을 추천하고 싶다. 반려동물과 산책을 하다 휴식이 필요하다면 이곳에서 조용히 차 한 잔을 즐길 수 있다. 옆 테이블 사람들을 배려하는 에티켓을 지킨다면 사장님이 주시는 간식도 덤으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보틀팩토리/서대문구 홍연길 26/@bottle_factory

일회용품을 쓰지 않는 착한 카페다. 매달 한 번씩 로컬 팝업 시장 ‘채우장’이 열려 이 지역 사람들과 물건들을 만날 수 있다.


2

#Lodge190 /서대문구 홍제천로 190/@lodge190

직접 구운 그레놀라와 달콤한 프렌치토스트가 맛있다. 이와 어울리는 정성스러운 음료가 준비되어 있다.


3

#까페여름/서대문구 가재울로6길 53-3/@cafe_yeorm

가게 안에서 직접 로스팅한 신선한 원두로 내린 커피를 마실 수 있다. 계절마다 나오는 시즌 블렌딩 원두를 즐길 수 있다.          


정규환  

프리랜서 에디터. 20대의 절반 동안 영화사, 

영화제 및 각종 아르바이트를 섭렵했다. 매거진 <GQ>, <뒤로>, 

‘앨리바바와 30인의 친구친구’ 등에 성소수자 관련 에세이를 기고했다. 

인권 운동을 하다가 만난 게이 파트너와 5년째 동거 중이다. 


위 글은 빅이슈 1월호 219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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