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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Jan 16. 2020

[가만히 많이] 열여덟과 쉰여덟 사이


글·사진이진혁   

        




“나이를 먹는다는 게 어쩌면 생각보다 답이 없는 일인지도 모르겠어.” 1월 1일 밤, 새해 첫 연락 치고는 다소 뜬금없는 메시지가 날아들었습니다. JTBC 신년토론을 시청하던 친구가 ‘보고 있기 민망하다’며 보낸 것이었습니다. 잠깐 TV를 켜보니 대학 시절 그 친구와 내가 좋아하던 사람들이 여럿 나와 얼굴을 붉혀가며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주제는 ‘한국 언론, 어디에 서 있나’였는데 그걸 보고 있자니 한국 언론의 문제를 조금 더 잘 알게 되기는 했습니다. 언론이 지나치게 적대와 혐오에 발 딛고 있다는 평소 생각이 더 커졌거든요. 지금 시대가 도대체 어디에 서 있는지를 도로 묻게 되기도 했습니다. 출연자들이 ‘시대의 아이콘’으로 불리던 이들인 탓도 있겠지만, 그들이 하나도 민망해하지 않은 탓이 더 컸습니다. 보는 내가, 우리가 이렇게 얼굴이 빨개져서 부끄러운데 말이죠.   

   

그 토론을 보다가 지난가을에 아버지와 나눈 짧은 대화가 떠올랐습니다. 아버지와 저는 한국의 부자지간이 대개 그렇듯이 많은 말을 나누는 편은 아니지만, 그날은 갑자기 날씨가 선선해져서 걷기 좋았고 저는 문득 산책자의 외로움이 발동해 아버지께 전화를 걸었습니다. “날씨가 꽤 쌀쌀해졌어요, 감기 안 걸리셨죠.” “나는 괜찮다. 너는 네 걱정이나 해라.” “별일 없으시죠?” “경기가 안 좋아서 큰일이다. 서울은 그래도 좀 괜찮지?” “여기도 엉망이죠 뭐.” 그리고 몇 초 정적이 흐른 후에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나아지겠지?” 질문인지 아닌지 모를 그 말이 왜 그렇게 슬펐을까요. 제 기억 속에 아버지는 늘 당신의 답안지를 갖고 있던 분이었는데 그런 아버지가 저에게 나아지겠느냐고 묻고 있었습니다. 차라리 그때 아버지가 누구 욕이라도 시원하게 했다면, 지금 TV에서 토론하는 저 사람들처럼 독설이라도 퍼부었다면 기분이 나았을 텐데요.      


친구에게 연락이 오기 전까지 저는 아이패드로 지난해에 방영한 드라마 <열여덟의 순간> 2회차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대학 진학이 가장 큰 고민인 아이들이 나와 공부는 안 하고 연애만 하는 ‘현실 판타지’인데, 그 착한 이야기가 참 예쁘고 좋았습니다. 주인공 최준우(옹성우)는 하나뿐인 가족인 엄마와 떨어져 혼자 고등학교를 다니는데 극 중에서 이런 독백을 합니다. “철없고 어린 우리 엄마. 그래도 나한테서 도망가지 않았던, 그 옛날의 어린 엄마.” 엄마를 이해하기 시작한 드라마 속 열여덟의 아이와, 토론 방송에서 펼쳐지는 쉰여덟들의 벌건 얼굴이 겹쳐져 조금 서글퍼졌습니다. (마침 토론 참여자 한 명이 “저는 판타지는 싫어해서요”라고 말합니다.) 그 친구에게 어떻게 답장을 보낼까 한참을 망설이다가, 나이를 먹고도 답이 좀 없는 게 좋을 수도 있겠다고 말했습니다. 아마 영문 모를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송경동 시인의 시 <가리봉 공구점>에는 공장에서 노동운동을 하다가 오랜만에 공구점을 찾은 화자가 등장합니다. 그는 좌판에 늘어선 각기 다른 용도의 공구들을 보다가 “낱낱이 다르다고 느꼈던 우리가/사실은 한 리어카 거리밖에 안 되는/저 착한 공구들 한 묶음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신념과 대의에 따라 헐뜯고 싸우던 일들이 문득 너무나 작고 소박하게 느껴져서입니다. 그 순간 가게 주인이 나와 어떤 게 필요하냐고 묻는데, 시는 이렇게 끝납니다. “예전엔 과학과 철학과 신념과 조직노선과 이론 등/필요한 게 참 많았던 것 같은데/이 서늘한 마음은/어떤 공구로 조여야 하는지/잘 모르겠다”.      


30년 넘게 기름밥을 잡수신 아버지의 “나아지겠지?” 하는 목소리가 자꾸 생각나는 새해 첫날입니다.           


이진혁  

출판편집자. 밴드 ‘선운사주지승’에서 활동 중.     


위 글은 빅이슈 1월호 219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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