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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Dec 20. 2019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아니하므로

내 친구가 사는 목동에 갔다

글 조은식 사진 박예담     





만약에 우리가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사고 싶은 것을 살 때, 그 값으로 화폐 대신 호기심과 애정을 지불하는 세상에 살게 된다면 어떨까요? 저는 서둘러 유능한 자산관리사를 찾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궁금하고 좋아하는 것이 많으니 주머니 사정이 괜찮다고 느끼겠지만, 곧바로 그 궁금하고 좋아하는 것에 가진 것을 모두 써버릴 게 분명하거든요.


취업을 목적으로 쓸 순 없겠지만, 저에겐 호기심/애정 이력서가 있답니다. 하나만 짧게 말해볼까요. 카페에서 누군가가 “사람은 이름대로 사는 걸까요?”라고 제게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대학원생이고, 성명학과 사주팔자로 논문을 쓰고 있다고 했습니다. ‘도를 아십니까’가 날이 갈수록 발전하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이름으로 ‘언덕 은(垠)’, ‘심을 식(植)’ 자를 쓰는데, 어릴 때부터 마음에 드는 뜻풀이를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언덕에 심어지는 ‘무언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왕이면 나무였으면 했고요. 하지만 살아보니, 저는 나무처럼 단단하고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무언가’를 언덕에 심고 기르는, ‘정원사나 심목꾼’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호기심과 애정은 필수 덕목일 테니, 저는 이름대로 살고 있나 봅니다.


제 마음속에는 추억 식물원이 있습니다. 자꾸 생각나는 기억들을 하나씩 화분에 심어놓던 것이 규모가 커졌습니다. 간직하고 싶은 기억들이 시들지 않게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갑니다. 한구석에 솔방울이 잔뜩 떨어져 있습니다. 그 구석을 가득 채운 친구가 사는 지역은, 비공식적이지만, 옛날부터 나무가 많다고 하여 ‘목동(木洞)’이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생각해보니 그녀의 이름도 ‘아름다운 소나무’라는 뜻의 순우리말인 ‘예솔’이네요.     


약속 날, 예솔이는 목동역 3번 출구와 가까운 ‘커피별 녹색잔’에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카페에 좋은 일들을 가득 담고 싶으시다는 카페 사장님의 바람대로, 도착하기 직전의 따뜻한 경험을 가져갑니다. 목동에 다 와서 버스를 갈아탔을 때, 자리에 앉자마자 마이크를 착용하신 운전기사님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자리에 앉으시고 안전띠를 매어주세요.” 그렇지 않아도 저는 평소에 ‘버스에는 왜 안전띠가 없을까’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 재빨리 허리춤 주변을 더듬거리며 몸을 들썩였습니다. “마음 안전띠입니다, 내릴 때 풀어주시길 바랍니다.” 꽤나 오랜만에 만났지만, 예솔이를 보는 순간 반가움과 익숙함을 느낍니다. 조여 맨 관계 안전띠를 풀고, 이야기 뷔페에 앉습니다.     


이런 곳은 어떻게 알았어?

술 먹은 다음 날 해장하려고 짬뽕 집에 가는 길이었어. 술이 덜 깼는지 길을 잃어버린 거야. 그렇게 헤매다가 발견했지. 목동에 20년 동안 살아온 애인도 몰랐던 곳인데 내가 먼저 찾았어. 그래서 내 아지트 같아. 프랜차이즈가 아니라 개인 카페라서 더 그런 느낌이고.





아지트로 삼을 만큼 좋아하는 공간이야?

봐봐. 꿀자몽차를 시키면 이렇게 별이나 하트 모양으로 과일 껍질을 잘라서 담아주잖아. 이런 작은 디테일이 성의라고 생각해. 그니까, 생일에 그냥 치킨 기프티콘을 주는 건 성의가 없는 거야. 치킨이라도 ‘언니, 뿌링클 안 먹어봤다고 했지, 내가 뿌링클 좋아하는데 한번 먹어봐. 그거 보내줄게’, ’언니가 향 좋아하니까, 향초를 선물할게.’ 같은 게 성의라고 할 수 있지.     


우리가 통하는 것을 떠올려봅니다. 즉흥적이고 어쩌면 엉뚱하고, 자기만의 포인트가 확실히 있는! 이곳을 처음 알게 된 과정도, 좋아하는 이유도 참 예솔이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날씨가 좋기도 하고 동네를 걸어보고 싶었습니다. 주말이고, 낮인데도 그날의 목동은 한적했기 때문입니다. 서울을 돌아다니는데 이렇게 편안함을 느낀 적이 있나 싶습니다. 산책을 하자는 말에, 예솔이는 안양천 생태공원으로 향합니다. 오목교를 끼고 내려가는데, 옆에서는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탁 트인 전경에 제 마음도 뻥 뚫립니다.     





집 근처에 이렇게 좋은 공원이 있다니, 운동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자주 오겠다.

이사 와서 알게 된 곳인데 진짜 좋아해. 걸어야만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있잖아. 사람들 말소리 같은 거. 기억에 더 잘 남아. 자전거도 탈 수 있고, 무엇보다 강아지가 많아서 좋아. 아, 양천구 지도 모양이 강아지처럼 생겼다?!


강아지 좋아해?

응. 최근에 좋아하기 시작했어. 여기 공원에 오면, 저기 천막 밑에 항상 강아지들이 모여 있어서 신기해. 너무 귀여워. 강아지들이 다 다르게 생겼는데, 신기하게도 다 자기 주인을 닮았다? 강아지들은 대체로 사람을 좋아하잖아. 나한테 절대적인 사랑을 주는 존재가 별로 없거든. 가족? 애인? 근데 강아지들은 나밖에 모르잖아. 나중에 애인이랑 강아지 두 마리랑 같이 살고 싶어. 그러려면 집도 더 커야겠지.


목동에는 애인이랑 같이 살고 싶어서 이사 왔다고 했지?

대학교 다닐 때는 항상 학교 근처에서 살았는데, 졸업 후에는 접점이 없잖아. 서울에는 살고 싶은데 집은 울산이니까 여기에 연고가 없고. 애인이 나의 연고가 될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이니까. 그런데 애인이 아니더라도 같이 살고 싶은 친구가 있었으면, 그 친구 동네에서 살았을 것 같아.


왜 서울에서 살고 싶은 거야?

그냥 학생 때부터 그랬어. 고등학생들에겐 성공의 지표잖아. 재밌는 거 많고, 맛있는 거 많고. 오히려 내가 태어난 울산에는 추억이 없어. 학생 때 내내 기숙사 생활을 하기도 했고. 그런데 서울은 내가 친구들과 다니면서 좋아하는 장소들이 있어. ‘울산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이 어디야?’라고 하면 우리 집이야. 정말이야. 울산에 가본 곳 얘기하라면 할 순 있지만 좋아하는 곳은 없어. 근데 ‘서울에서 좋아하는 곳이 어디야?’라고 하면 말할 곳이 많은 거지.


살아보니까 어때?

이사 오기 전에는 그냥 아파트 단지에 나무가 많아서 좋아 보였고, ‘아, 진짜 동네네.’라는 생각을 했어. 오고 나서는 진짜 나무가 많고(웃음) 학군 때문인지 목동에 가족들이 많이 사는 것 같아. 주말에 가족끼리 쇼핑 나오고 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그러고 싶더라. 오래된 밥집도 많아. 20년 된 청국장집 같은? 지금 엘피를 하나둘씩 사 모으고 있어. 나중에 더 넓은 집이 생기면 턴테이블을 두고 듣고 싶어.


강아지, 동반자, 집. 모두 큰 책임이 따르는 것들이네. 우리 처음 만났을 때는 둘 다 어렸는데, 어느새 이런 것들을 얘기하고 있으니 기분이 묘하다. 미래 계획이 구체적인 것 같은데, 계속 목동에서 살고 싶은 거야?

이 동네와 나를 연관시키자면, 나는 뿌리를 내리고 싶어 하는 사람이야. 여기서 이미 어른 나무들은 사이좋게 지내고 있지만, 나는 아직 완전히 자리 잡지 못했어. 기반도 없잖아. 그런데 왠지 목동에 살면 서울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학교 근처에는 자취생들이 많잖아. 왔다 가는 사람들도 많고. 대학가의 금요일 밤에 술 취하는 그런 분위기가 너무 싫었어. 그래서 서울에 살아도 가족이 많은 동네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고. 나는 집 계약이 끝나면 언제든지 서울 사람이라는 근거가 없어지잖아? 누군가와 같이 살고 싶다는 게 연고를 만들고 싶다는 얘기였어. 옛날에는 우리 동네라는 말도 쓰지 않았어. 그냥 무슨 동, 홍은동, 남가좌동, 연희동 이렇게. 그런데 요즘에는 우리 동네라는 말을 써. 내 거로 받아들인 것 같아. 예전 살던 곳들은 ‘학점을 다 채우면 이곳을 떠날 것이다.’라는 게 있었으니까. 

    

카페에서 공원에 갈 때 택시를 탔었습니다. 차에서 내리자 예솔이가 첫인상 이야기를 합니다. 예솔이에게 저는 어수룩한 스무 살로 보였답니다. 그런데 자기는 택시 운전기사님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을 어른으로 생각한다면서, 이제는 제가 어른이라고 합니다. 예솔이가 생각하는 제가 많이 변했듯이, 제가 생각하는 예솔이도 많이 변했습니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을 바란다면 뿌리 내릴 곳을 찾아 자라는 아름다운 소나무와, 호기심과 애정 많은 식목꾼의 우정일 것입니다.               


조은식  소개말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


위 글은 빅이슈 12월호 216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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