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 공동체 ‘전기가오리’ 운영자 신우승
글 황소연 사진제공 신우승
‘철학’이라는 단어와 함께 떠오르는 몇 가지 풍경들. 고대 그리스, 근엄한 표정의 철학자들, 멋진 명언들. 하지만 ‘전기가오리’는 철학이 큰 세계관을 제시하거나 무언가를 외워야만 한다는, 철학을 둘러싼 ‘신화’를 깨고자 한다. 철학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공동의 합리적 활동. 전기가오리 홈페이지의 명징한 소개는 철학에 대한 새로운 호기심을 품게 한다. 전기가오리라는 이름은 플라톤의 <메논> 속 메논이, 자신의 확신을 깨뜨린 소크라테스를, 마치 마비시키는 듯한 충격을 주는 전기가오리에 비유한 데서 출발했다.
직접 지방의 후원자를 찾아가 함께 철학을 공부하는 장을 만들고, 영어 텍스트 이해를 위한 프로그램을 꾸리면서 철학을 공부하는 시민의 확장을 목표로 삼는 전기가오리. 최근엔 크게 성장해 후원을 하려면 대기 신청을 해야 할 정도다. 철학을 이야기하는 도서를 만들고, ‘문제 해결 집단’으로서 나아가고 있는 공부 모임이자 출판사인 전기가오리의 운영자 신우승과 이야기를 나눴다.
전기가오리의 출판물은 ‘철학 구몬’이라는 애칭(?)이 있는데요. 일회성이 아닌 꾸준하게 할 수 있는 철학 공부 커리큘럼을 짜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또, 꾸준한 철학 공부의 장점은 무엇으로 꼽을 수 있을까요?
대학 밖에서 철학을 공부하면서 세 가지가 아쉬웠습니다. 하나는 강의들이 단발성이라는 점입니다. 단발성으로 끝나지 않고 장기적으로 이어지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특정 주제에 치우친다는 점입니다. 영미 현대 철학에 대한 접근을 제공하고 싶었습니다. 마지막 하나는 단계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입문자에게 적합한 프로그램부터 전공자에게 적합한 프로그램까지 다양한 수준의 프로그램이 있으면 했습니다.꾸준한 철학 공부의 장점에 별다른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꾸준한 사회학 공부’, ‘꾸준한 물리학 공부’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저는 공부는 그 자체로 유의미한 활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전기가오리의 출판물을 통해 철학을 접하고 공부하는 독자들의 반응도 궁금합니다. 몇 가지 후기나 반응을 소개해주신다면요?
전기가오리는 지역 격차를 극복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제가 직접 찾아가거나 온라인 방송을 통해 교육 서비스를 제공할 때 많은 분께서 유익하다고 말씀해주신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현대 한국어를 적극적으로 반영한 번역 원고나 특정 주제의 논문에 대한 해설 등도 반응이 좋았고요. ‘전기가오리 짱이에요’ 같은 표현이 없지는 않지만 그것을 직접 말하자니 너무 민망합니다.
새해에는 어학이나 독서 등 새로운 배움을 계획하는 이들이 많은데요. 꾸준하게 새로운 배움 혹은 습관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생활을 물리적인 수준에서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의지와 다짐만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것 같아요. 만나는 사람, 자고 일어나는 시간, 먹는 것, 책을 읽는 장소 같은 것을 조금씩 바꾸면서 자기 삶을 개선하는 편을 제안합니다. 상황이 원하는 대로 바뀌지 않을 때 너무 실망하지 않는 것도요. 오늘 안 되면 다음 주에 하면 되죠, 뭐.
<인터넷은 좌판을 깔고> 프로그램처럼, 직접 전기가오리를 후원하는 이들에 대한 설명을 병행하고 있으신데요, 이로 인해 기대하는 효과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말 그대로 설명을 전달하고 싶습니다. 공부는 혼자 하다가, 같이 하다가, 혼자 하다가, 같이 하다가, 이런 과정의 반복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책을 같이 읽을 수 없고, 토론을 혼자 할 수 없는 것처럼요. 다만 철학에 처음 진입하실 때에는 친절한 설명을 들으시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진입자께서 명료한 방식으로 철학 텍스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책을 낸 뒤 나 몰라라 하는 출판사로 남고 싶지는 않습니다.
<영어 텍스트 읽기를 도와드립니다> 프로그램의 경우, 철학 공부가 아닌 영어 공부로서의 특징이 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걱정하는 분들도 많을 것 같은데, 이 지점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한국어 학술 텍스트는 영어와 일본어의 영향을 깊이 받았습니다. 영어 텍스트를 읽는 훈련을 하는 것은 더 높은 수준의 텍스트를 읽는 연습일 뿐 아니라, 한국어로 된 학술어를 또 다른 관점에서 이해하게 하는 발판이기도 합니다. 영어뿐 아니라 철학 자체에 대해서도 설명을 많이 해두었으니 해설지만 읽으셔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전기가오리의 성장 이후, 크기를 자체적으로 제한하는 방식을 택하고 계시는데요. 후원 회원 대기신청 외에 전기가오리의 철학 공부에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절대 없습니다. 전기가오리는 후원자의, 후원자에 의한, 후원자를 위한 단체이며, 후원자와 비후원자 사이의 간극을 최대한 벌리는 것이 운영자로서 제가 가장 초점을 맞추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외부 강의에도 전연 응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 일을 30년 정도 하고 싶은데요, 장기 지속성을 위해서는 이러한 방식의 운영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2020년 출간예정 도서 중 하나가 ‘철학적 보드게임’이라고 홈페이지에서 밝혀주셨습니다. 이 게임에 대해 약간의 힌트를 주실 수 있을까요?
가제는 ‘철학과 대학원생의 X의 일상’입니다. 철학과 대학원생의 페이소스, 대학원 생활의 부조리함, 철학 지식에 대한 안내 등을 유머러스하게 섞어서 보드게임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철학 공부를 통해 격차해소에 기여하고자 하는 목표를 세우셨는데요. ‘철학은 철학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공동의 합리적 활동’이라고 밝히신 점이 인상적입니다. 2020년, 전기가오리가 철학 공부와 모임을 통해 드러내고 싶은 문제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지역, 소득, 학력, 젠더 등을 떠나서 누구나 편히 공부할 수 있는 모임을 꾸리고 싶습니다. 지역 격차는 제가 직접 찾아가거나 온라인 설명을 제공하는 것으로 최대한 극복하려고 하고 있고, 그 외의 지점에서도 공부 모임 비용을 받지 않는 등 가능한 한 진보적인 방향을 택합니다. 올 상반기에는 장애인을 대상으로 점자책 등을 제작하고, 택시를 운용하고, 공부 모임을 열려고 합니다. 전기가오리는 철학을 공부하는 ‘시민’의 외연을 넓히는 데 주력합니다. 철학이 서울에 거주하는 대졸 중산층의 전유물이어서는 안 됩니다.
일상에서 전기가오리 외에도 철학 공부를 꾸준히 실천할 수 있는 팁이나 습관이 있을까요?
철학 공부는 혼자 할 수 없습니다. 전기가오리로 오세요.
혼자 철학공부를 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철학이 다루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어렵고, 철학에서 쓰이는 개념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혼자 공부하면 용어에만 익숙할 뿐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기 쉽습니다.
새해에 새로운 배움을 위해 계획하는 사람에게 전기가오리를 추천한다면, 어떤 장점으로 홍보하고 싶으신가요.
후원 회원으로 가입하시면 다양한 주제의 철학 텍스트는 물론이고 여러 가지 방식의 설명 서비스를 접하실 수 있습니다. 전기가오리는 출판사보다는 학원을 지향하는 곳입니다.
위 글은 빅이슈 1월호 219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