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 박 로드리고 세희
일주일 남짓한 여행을 마치고 바르샤바를 떠나는 날이었다. 공항 가는 버스가 승차장에 들어서자 사람들은 일사불란하게 여행 가방을 짐칸에 넣고, 계산을 치르고 승차표를 받아 저마다의 취향에 맞춰 자리를 골라 앉았다. 어쩌다 보니 내가 버스에 올라탄 것은 제일 나중이었는데 다행히 맨 앞자리가 비어있었다. 쾌재를 부르며 냅다 자리를 차지했다. 낯선 도시를 여행하는 이에게 가장 명당 아니던가.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바르샤바에서의 마지막 풍경을 감상하다 보면 어느새 나는 공항에 도착해 있을 것이었다.
폴란드의 수도인 바르샤바는 역사적으로 전쟁이 빈번했고 이웃 나라로부터 침탈당하기도 여러 번이었다. 시민들이 애써 가꾼 도시는 번번이 폐허가 되었고 그런데도 시민들은 재건하기를 반복하며 쇼팽, 요한 바오로 2세, 코페르니쿠스, 퀴리 부인 등의 위인을 낳은 도시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입은 상흔은 치명적이어서 도시의 8할이 파괴됐었고, 그 후에는 구소련의 영향권에 놓인 사회주의 국가가 되어 더딘 경제 발전으로 오랫동안 신음해온 도시였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다 옛말이 되었고 오늘날의 바르샤바는 동유럽의 문화 수도가 되어 세련된 감각이 넘실대는 첨단의 도시로 탈바꿈했다. 고풍스러운 미적 기반 위에 현대적으로 재건된 도회적 아름다움은 마치 파리의 구시가지와 뉴욕의 맨해튼을 포개놓은 것처럼 클래식과 모던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이 아름다운 도시에 매혹되지 않을 수 없었다.
버스에 앉아 바르샤바 여행을 반추하며 감회에 한참 젖어있었는데, 웬일인지 버스는 여태 출발하지 않고 있었다. 정해진 출발 시간이 있는 건가? 그런 안내는 없었는데. 아니면 승객이 찰 때까지 기다리는 건가? 나는 잠시 버스에서 내렸다. 바르샤바의 풍경을 조금이라도 눈에 더 담기 위해. 그러나 내 발걸음은 버스에서 몇 발짝 떨어지지도 못하고 묶여버리고 말았다. 버스 곁에 선 한 연인 때문이었다. 남자는 바르샤바를 떠나고, 여자는 남자를 배웅하는 모양이었다. 남자는 어디로 떠나며, 얼마나 헤어져 있어야 하는 것이었을까? 여자는 하염없이 울었다. 남자는 여자를 안아주었고 속삭였고 달랬다. 그래도 여자는 계속 울었다. 그들은 긴 키스를 나누며, 당분간 마지막이 될 둘만의 작별의식을 치르고 있었다. 나도 이 사랑스러운 도시를 떠나는 아쉬움이 가득했지만, 그들에게 비할 바가 아니었다. 더구나 바르샤바를 떠나는 나만 아쉽지, 나를 아쉬워하는 사람은 바르샤바엔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여행자의 가벼운 운신에 따른 숙명이건만, 그런 생각에 이르자 조금은 쓸쓸해졌다. 나는 저토록 애절하게 누군가를 배웅한 것이 언제가 마지막이었나 싶었고, 서울에 남겨진 나의 연인이 불현듯 그리워지기도 했고.
때마침 버스 창에는 바르샤바의 명물이자 사회주의 시절의 산물인 문화과학궁전이 비치고 있었다. 구소련의 전형적인 스탈린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저 연인의 부모님도 사회주의 체제 아래에 있었을 때, 이 장소에서 연인을 떠나보내며 하염없이 울었을지도 몰랐다. 사랑하는 마음이란 체제를 초월한, 시절을 초월한 다 같은 사람의 마음일 것이므로. 버스는 연인의 작별의식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무도 재촉하지 않았고 투정하지도 않은 채.
박 로드리고 세희
영화와 드라마, 다큐멘터리를 넘나드는 촬영감독이다.
틈틈이 여행을 하며 사진을 찍고 사람이 만든 풍경에 대해서 글을 쓴다.
위 글은 빅이슈 2월호 220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