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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Feb 15. 2020

정신과 다니는 걸 들킨 어느 회사원의 고백

저는 매일 출근하는 중입니다


글·그림 서귤

어쩌죠. 정신과 진료를 받는다는 걸 회사 동료들이 알아버렸어요.


3년 차 양극성 기분장애(일명 ‘조울증’) 환자인 저는 두 개의 직업을 가지고 있어요. 사무직 회사원,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작가. 오랫동안 회사에 작가로서의 나를 알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어요. 필명을 쓰고 정면 사진도 공개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역시 세상에 비밀이란 없나 봐요. 


‘잘 읽을게요.’


팀장님으로부터 메시지가 와서 아무 생각 없이 봤거든요. 근데 메시지와 함께 제가 출간한 만화책을 찍은 사진이 와 있는 거예요. 순간, 눈이 흐릿해지고 손가락이 떨려왔어요. 그 만화책의 제목은 <판타스틱 우울백서>, 가제는 ‘서귤의 정신과 치료일기’였어요. 


‘어떻게 알았지?’


제 주변에는 저의 조울증을 알고 있는 분들이 있어요. 숨기는 게 귀찮고 싫어서 털어놓았어요. 친구들에게는 비교적 쉬웠는데 부모님께 말씀드리기가 좀 어려웠어요. 그분들이 제 병에 대해서 죄책감을 가질까 봐 걱정됐거든요. 그때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어요. 부모님의 감정은 부모님의 것이니까 스스로 느끼고 판단하시도록 내버려두라고…. 저는 사실을 말씀드렸고, 내버려뒀어요. 그리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세요? 제가 낸 우울증 책에 대한 기사가 포털 사이트에 올라온 적이 있는데, 아버지가 그 기사를 친구, 친척, 교회 사람들, 조기 축구회 회원들과 직장 동료들에게 보내면서 자랑하시는 거예요. 그걸 보고 화장실에서 조금 울었어요. 저는 조울증 앓는 딸을 부모님이 부끄러워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평생을 알고 지낸 사이인데도 어쩜 그렇게 당신들에 대해 무지했는지….


그렇게 한 단계, 한 단계 ‘울밍아웃(우울증+커밍아웃)’을 해나갔지만 직장 동료들에게는 전혀 생각이 없었어요. 제 병이 약점이 될까 봐요. 선입견이 생겨서 중요한 일에서 제외되거나 같이 일하기 싫은 대상이 되어 버릴까 봐 무서웠어요. 그래서 비밀로 했던 건데 이런 일이 생기다니…. 


한 시간 정도 고민하다가 팀장님의 카톡에 답장을 했어요. 


“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 하나의 고뇌와 ‘ㅋ’ 하나의 초조함과 ‘ㅋ’ 하나의 쿨한 척과 ‘ㅋ’ 하나의 대출금, 대출금…. 그 주말에 저는 치킨과 피자와 쿼터사이즈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내일이 없는 것처럼 방탕하게 살았어요. 월요일은 어김없이 다가 왔고, 이를 악물고 집을 나섰어요. 도착해서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팀장님을 만났어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몸을 돌리고 고개를 빳빳이 들어 층계 표시창만 쳐다보 았어요.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를 온몸으로 표현했죠. 도망치는 걸 택한 거예요. 눈치가 빠른 팀장님은 별다른 말을 건네지 않았어요. 어쩌면 제가 떨고 있는는걸 알고 그랬는지도 몰라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바쁘게 하루를 보냈어요. 나중에 동료 중 친한 이에게 얘기를 했죠. 팀장님이 내 작가 활동을 알고 있어서 너무 놀랐다고. 그런데 도리어 저에게 묻더라고요.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네?” 


지난가을에 있었던 일입니다.


해가 바뀌어 저는 4년 차 양극성 기분장애 환자가 되었고, 매일 회사에 나가고 있어요. 세상에, 매일이요! 미리 연차를 낸 경우를 제외하곤 단 한 번도 무기력에 무너져 결근을 하지 않았다고요! 그리고 다들 말은 안 하지만 팀원들 대부분이 제 작가 활동과 정신과 치료 사실을 아는 것 같아요. 걱정이 안 된다면 거짓말이겠죠, 회사는 냉정한 곳이니까. 언제든 정신과를 다닌다는 사실이 저를 공격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미리 겁을 먹지는 않으려고요.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상상하고 두려워하는 일, 우습고 유치해요.


그리고 저는 조금 긍정적인 생각을 가져보려고 해요. 회사에는 썩 유쾌하지 않은 방식으로 자기의 입지를 다지고 동료를 깔아뭉개는 사람들이 있지만, 적어도 누군가의 정신병을 약점으로 휘두르는 일은 촌스럽고 치졸해서 기피하는 행위가 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요. 이 생각이 맞는지 안 맞는지 보려면 어쩔 수 없이 당분간은 회사를 열심히 다녀야겠어요. 대출금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니고요. 사장님, 늘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서귤   

고양이를 먹여 살리기 위해 회사를 다닌다.  

퇴근하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다.  

그림책과 만화책, 에세이집을 냈다.  

2019년 출간한 <판타스틱 우울백서>는  

정신과 치료기를 담은 만화책이다.


위 글은 빅이슈 2월호 220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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