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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Feb 27. 2020

[취향의 발견] 중언부언


글‧사진제공 배민영

누군가가 나를 ‘에세이스트’라고 소개하는 순간 여지없이 무너졌다. 하긴. 에세이면 어떻고 칼럼이면 어떻고, 객관이면 어떻고 주관이면 어떠랴. 언제부턴가 그런 생각의 숨통이 트이니 글을 쓰는 일이 조금 자유로워졌다. 사실 지금도 몇 줄 위에 쓴 ‘작가를 위한 작가론’ 같은 표현은 거슬린다. 필자에게는 마치 100m 이내에 동일한 가맹점을 내면 안 된다는 –잘 지켜지지는 않는 것 같지만- 공정거래위원회의 방침만큼이나 원칙적으로 몇 문장 내에 같은 단어가 다시 등장하지 않아야 한다는 탈고 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해 들어 이런 자기 검열의 벽을 조금씩 허물기 시작했다. 이것은 지난해 9월에 이 코너에 소개한 건우 작가가 이번에 데뷔하는 마리 작가와 함께 2인전으로 이달 24일까지 여는 <토톨로지展>을 준비하게 되면서 더욱 본격화되고 있다. 서문 일부를 통해 기획의 변을 늘어놓자면 다음과 같다.


토톨로지(tautology). 중언부언. 네이버 영어 사전에서는 “유의어(類義語) 반복(불필요하게 같은 뜻의 말을 표현만 달리 하여 되풀이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이렇게 여러 사전을 뒤적이는 행동조차 토톨로지인데, 여하튼 우리는 언어의 노예이고 언어 속에서 무언가를 계속 규정하고 믿고, 약속하고, 속았다고 토로한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러면서 직감을 믿는다. 그리고 제한적으로 학습된 문법에 의해 사람을 판단한다. 그렇다. 여기서 꼭 힘주어 말하고 싶은 게 있다면, ‘인간은 언어적 존재’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언어 능력이 여타 동물에 비해 확실한 비교 우위를 갖는다는 점을 이따금 상기하고 좋아하지만, 사실 그래서 더 나약하게 휘둘리며 헤드라이트를 켜고도 사각에 펼쳐진 밤길의 컴컴함에 두려워한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열심히, 자세히 말해주고 듣기이지만, 그것은 너무나 귀찮은 일이다. 


건우 작가의 스키마가 깨진 언어적 특성은 그를 세상에서 조금은 소외되게 만들었지만, 그림이라는 또 하나의 언어를 통해 교감하며 다양한 대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마리 작가의 틱 증상은 청소년기 사회적 존재로 살아가는 데 있어 장벽 또는 장애(barrier)가 되기도 했지만, 흔히 쉽게 ‘장애’를 handicap이나 disability라는 폭력적인 말로 규정하는 문화 속에서 자신만의 색을 잃지 않고 또한 가꿔나가기 위해 꾸준히, 그리고 치열하게 다이어리를 기록해왔다. 두 작가는 우리 각자가 대화를 해나가는 방법에 대해 개인적 아픔(illness)이나 질병(disease)으로 보기보다는 하나의 증상(symptom)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 이렇게 전시 서문을 잡지 원고에 재활용하는 것도 ‘중언부언’이라고 누군가는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이것이 바로 전시(展示; 펴서 보임) 방법의 전방위성이자 궁극적인 목적이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 과도하게 검열된 일종의 사회 통념적 문법과 구색을 우선시하는 체면 때문에 반복이나 복사, 전송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 각자의 괜찮은 주관들은 객관화되지 못하고 밟힌 싹이 되곤 할 것이다. 의외로 주인 없는 언어가 많고, 반복에 느끼는 염증은 본능이 아니라 교육의 결과인 경우가 많다. 우리가 이번 전시에서 오프닝을 대신해 이른바 ‘중언부언 토크 파티’를 준비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5초 안에 눈길을 사로잡아야 하는 광고의 무한 경쟁 시대라지만, 중언부언자들에겐 죄가 없다! 


 배민영

예술평론가. 갤러리서울, 취향관 등에서 편집장, 

전시와 시즌 테마 기획 등을 담당했으며, 

변화하는 삶에 대해 배우는 자세로 놀 듯이 일하고 있다.     


시각자료 이원경

구경꾼과 관광객, 관람객의 말을 수집해 시각으로 번역하기, 

본 것을 상황으로 전달하기, 보는 시간 기부하기의 

가능성을 탐구 중이다. 세상에 펼쳐진 풍경을 느리게 감상하길 

선호하며 필름 사진 연작을 주로 생산한다.


위 글은 빅이슈 2월호 221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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