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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Mar 06. 2020

[밤에 읽어주세요] 밤을 위한 짧은 필름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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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바치는 영화, 라는 문구를 보았다. 그리고 혼잣말. 밤마다 홀로 속삭임을 주고받는 사람은 사랑에 빠진 사람이다.     


그런가요?

그래요.     


아침부터 함박눈이 쏟아진다. 지난밤, 내 꿈에서 시작된 눈이다. 바람의 지휘에 따라 하프로 시작해 피아노로, 오보에와 바이올린, 첼로로 넘어가는 폭설의 악보. 휘날리는 눈송이를 보며 가만히 앉아 있노라면 까닭 없이, 아니 까닭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애상에 젖는다. 오늘 같은 날은 누구나 백기를 드는 것이다. 순순히. 예술적으로. 내가 졌어요. 한 사람이 마침내 견딜 수 없는 마음으로 집을 뛰쳐나가 눈보라를 헤치고 달려간다. 검은 숲을 지나 저기, 홀로 불 밝힌 한 사람의 문을 두드린다. 당신이 이겼어요. 그 사람은 이미 텅 비어 있는데도, 계속해서, 계속해서, 끊임없이 두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속삭임. 이 꿈에서 깨고 싶지 않아요.


지난밤, 내 꿈의 연인은 어린 Y였다. Y와 나는 눈이 많이 오는 한 시골 마을에서 함께 자랐다. 사랑에 빠졌다. 아무도 우리가 연인임을 알지 못했고, 우리는 그 사실을 흥미롭게 여겨 남몰래 사랑의 신호를 주고받곤 했다. 그가 턱을 괴면 나도 턱을 괴었다. 그가 두 손을 모아 입술에 가져다 대면 나도 두 손을 모아 입술로 가져갔다. 모두가 아는 사랑은 시시하고 아무도 모르는 사랑은 위태롭다. Y와 나는 위태로울 때 서로에게 열렬했다.


어린 Y를 떠올리면 즉각적으로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고향을 떠나 각자 다른 지역에 머무르던 시기였다. 어느 봄밤에 Y가 공중전화로 연락을 취해왔다. Y는 울먹이며 말했다. 너에게로 가도 돼? 나는 Y에게 오라고 했다. 동전이 다 떨어지기 전에. Y는 밤길을 달려와 한낮에 문을 두드렸고, 나는 그런 Y가 새삼 낯설어서 잠시, 숨죽이고 있었다. 사랑은 밤의 게임이지 낮의 게임이 아니다. 그리고 암전. 우리는 그해 겨울을 끝으로 다신 만나지 않았다. 모든 사랑의 엔딩은 비극임으로. 우리는, 적어도 나는 태평했다. 어린 Y는 비극적인 결말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런 이유로 훗날 나는 Y에게 가까이 가고자 했고, Y는 나를 멀리했다. 다른 사랑은 없어요. 


조 스태포드의 ‘No Other Love’가 흘러나온다. 앨범의 스무 번째 트랙. 눈 오는 날 조 스태포드의 목소리를 들으면 까닭 없이 작별하고 싶다. 그녀의 목소리는 연인들을 위해 신이 내린 은총이다. 그 밤, 동전이 떨어지기 전에, 우리의 대화가 뒤바뀌었더라면 어땠을까.     


들어올래요?

들어갈게요.     


지난밤 보았던 영화 속 대사가 떠오른다. 눈 쌓인 강변에서 두 여인은 말했다. 눈이 오는 데는 뭔가 이유가 있어. 맞아요. 눈만 그래요, 비는 안 그래요. 그 대화를 빌려보자면 꿈을 꾸는 데는 뭔가 이유가 있다. 사랑하는 데도 뭔가 이유가 있다. 맞다. 사랑만이 그렇다. 이별은 그렇지 않다. 이별에는 이유가 없다. 지금도 꿈속에서 나와 Y는 눈 쌓인 강변에 서서 속삭인다. 우리가 지워지는 눈 같아. 그 시절 Y는 볕과 같고 나는 눈과 같아서 Y가 다가올수록 나는 사라지고, Y가 멀어질수록 나는 존재했다.


보시라. 사랑에는 이토록 이유가 있다. (중략)


(224호에 이어집니다.) 


김현

읽고 쓰고 일한다. 시집으로 <글로리홀> <입술을 열면>,

산문집으로 <걱정 말고 다녀와> <질문 있습니다> <아무튼, 스웨터>

<당신의 슬픔을 훔칠게요> <어른이라는 뜻밖의 일>이 있다.


위 글은 빅이슈 3월호 222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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