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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Mar 08. 2020

우리 모두 벌레 아닌 꽃이 될 수 없을까


글·사진제공 박코끼리 



“거기서 어떻게 애를 키워!” 카타르로 해외 파견을 떠난 남편이 아이와 함께 이곳에서 지내는 게 어떠냐고 했을 때 나는 버럭, 성질부터 냈다. 하지만 어차피 기댈 곳 하나 없는 형편은 한국도 매한가지였고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하는 심정으로 카타르행을 택했다. 


“네가 힘든 건 이해하는데 돌도 안 된 애를 데리고 꼭 거기까지 가야겠니?” 지인이나 친척들에게 이런 말을 들으면 왠지 더 오기가 생겨 “네, 가족은 같이 있어야죠”라며 맹랑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혹시 애가 아프기라도 하면?” 같은 묵직한 한 방이 실린 질문을 받으면 굴전 먹다 껍데기 씹은 기분으로 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모래의 나라 카타르에 왔다. 


마치 사람 살 곳이 못 되는 나라에 가는 것처럼 법석을 떨었지만 막상 카타르에 오니 싱거울 정도로 후루룩 적응했다. 한국에는 있고 이곳에 없는 게 많아서 캐리어와 전두엽이 터질 지경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안도시킨 것 또한 한국에는 있고 이곳에는 없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한국에만 있는 것, 바로 ‘맘충’이라는 혐오어. 


아직 아이가 많이 어리고 내가 소심한 탓이겠지만 한국에서는 아이와 외출할 때마다 좌불안석이 되어 종일 주변 눈치를 봐야 했다. 상식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지 않더라도 아이가 울거나 보채서 공간의 분위기를 흐리는 것만으로도 주위 시선이 내게 쏠리는 게 너무 힘들었다. 어떤 곳은 아이와 함께 들어서는 순간부터 경계 섞인 탄식이 느껴졌다. 나 역시 아이를 낳기 전엔 기차나 비행기 옆 좌석에 유아 동반 승객이 오지 않길 바란 적이 있기에 그 마음을 잘 안다. 


세상 어디에나 이기적이고 몰상식한 행동을 하는 부모는 있고, 그들에 대한 불쾌한 경험과 사례를 공유하는 커뮤니티도 있다. 하지만 다른 걸 다 떠나서 ‘맘충’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 안착한 것만으로도 마치 어떤 사건의 용의선상에서 벗어난 것처럼 홀가분했다. 역시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은 까닭일까. 카타르에서, 아니 한국이 아닌 곳에서 아이를 키워보니 확실히 아이의 돌발 행동에 대한 시선이 뭉툭하고 희미했다. 그리고 때론 어리둥절할 정도로 따뜻했다. 


인구의 80% 이상이 인도, 동남아, 아프리카 등지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인 카타르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대우를 받는 한국인, 흔치 않은 ‘아시안 베이비’라서 더욱 격한 환영을 받은 부분도 있다. 어느 레스토랑에서는 홀 서버들이 테이블 주변에 서서 오랜만에 모인 친정 식구들처럼 한 명씩 아이를 안아보기도 하고, 옷이나 신발을 사러 매장에 갔다가 아이를 향해 몰려드는 직원들 때문에 민망하고 난감한 경우도 있었다. 가끔은 볼이나 손에 뽀뽀를 하는 등 거침없는 애정 표현을 당하기도 했는데, 요즘 같은 시국에는 뜨악할 일이지만 그 마음만은 진심으로 반갑고 고마웠다. 


많은 이들에게 넘치는 사랑을 받는 덕인지 아이는 지난 3개월 내내 무탈했고, 이제 곧 한국으로 돌아간다. 카타르에 올 때만 해도 한국에 돌아갈 땐 내 새끼 빼고 전부 다 버리고 가고 싶었는데, 갈 때도 올 때만큼 짐이 많을 듯하다. 너무 많아서 가슴 한편에 쑤셔 넣은 것처럼 마음까지 무겁다. 잠든 아이 옆에 누워 한국의 코로나19 관련 뉴스, ‘제가 맘충인가요?’ 같은 제목의 커뮤니티 게시물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말했다. “한국에서 어떻게 애를 키우지?”           


박코끼리  

하나라도 얻어 걸리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것저것 쓴다.

요즘은 일생일대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으며,

주로 참을 忍자를 쓰고 있다.


위 글은 빅이슈 3월호 222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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