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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Mar 10. 2020

[칼럼] 21세기 판 초원복집 사건을 막으려면


성현석     



1992년 1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둔 어느 날, 충격적인 폭로가 나왔다. 부산에서 맛있기로 유명한 식당인 초원복집에 고위 공직자들이 비밀 모임을 갖고 관권선거 모의를 했다는 내용이다. 당시 여당 후보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텃밭인 부산에서 호남 지역에 대한 혐오 감정을 부추기고 야당 후보를 비방하는 작업을 조직적으로 벌였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유명한 표현이 이때 나왔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김기춘 당시 전 법무부 장관, 김영환 부산직할시장, 박일용 부산지방경찰청장, 이규삼 국가안전기획부 부산지부장, 우명수 부산직할시 교육감, 정경식 부산지방검찰청 검사장, 박남수 부산상공회의소장이다.모임에서 좌장 역할을 했던 김기춘 씨는 당시 법무부 장관에서 물러난 상황이었다. 공식적으로는 민간인 신분이었는데, 주요 공직자들을 몰래 소집해서 선거 부정행위를 사실상 지시했다.      


명백한 불법 행위였으나, 당시 노태우 정권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뒤바꾸는 방식으로 국면을 전환했다. 가해자인 당시 정부와 여당을 도청 피해자로 묘사했다. 아울러 야당을 도청 범죄 가해자로 몰아갔다. 도청과 선거 부정은 모두 잘못이지만, 선거 부정이 더 큰 범죄다. 상대적으로 작은 잘못을 저지른 쪽이 오히려 지탄을 받는 형국이 됐다. 이 같은 프레임 전환을 주도했던 김기춘 씨는 이후로도 승승장구했다. 초원복집 사건으로부터 20년 뒤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 후보가 당선됐고, 김기춘 씨는 박근혜 정부에서도 권력 실세 노릇을 했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의 몰락과 함께 법정 구속됐다.      


28년 전 초원복집 사건을 다시 꺼내는 데는 이유가 있다. 당시 김기춘 씨가 발휘한 프레임 전환 수법은 그 뒤로도 한국 정치에서 두고두고 쓰였다. 가해자가 피해자 행세를 하며 승기를 잡는 방식은 지금도 흔히 본다.      


초원복집에 모인 이들

20세기 권력 내부자의 단체 사진     

그리고 초원복집 사건은 한국의 지방 권력이 생긴 모양을 사진 찍듯 보여줬다. 거의 한 세대가 지났지만, 그 모양새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초원복집에 모였던 이들의 직책을 다시 정리해보자. 전직 법무부 장관, 지방자치단체장, 지방경찰청장, 정보기관 지역 책임자, 지방검찰청 검사장, 지방교육감, 상공회의소 소장 등이다.

      

법 집행 책임자가 중심에 있다. 치안, 정보사찰, 교육, 지역의 기업인들이 주변에 있다. 권력의 이 같은 분포는 국가의 역할과 맞물려 있다. 전통적인 국가의 역할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 전쟁을 막거나, 전쟁을 치르는 일이다. 두 번째, 치안을 확보하고 공정한 법 집행을 보장하는 일이다. 권력은 역할의 중요도에 비례한다. 국가의 역할이 안보와 치안으로 설정되면, 이들 역할을 담당하는 이들이 강한 권력을 행사한다. 군대 지휘관, 그리고 경찰과 검찰 수뇌부는 그래서 근대국가 안에서 권력층 안쪽에 자리를 잡았다. 초원복집 모임은 지방 권력자들이 참가했으므로, 군대 지휘관은 빠졌다. 대신 경찰과 검찰 관계자는 포함됐다. 국가의 역할과 권력의 관계를 떠올리면 당연한 일이다.      


이후 국가의 역할은 더 늘어났다. 산업혁명이 발생한 영국에선 극단적인 빈부 격차를 먼저 경험했다. 19세기 아일랜드 대기근 당시에는 창고에는 곡식이 썩어 악취를 풍기는데, 그 앞에서 굶어죽는 이들이 속출했다. 비슷한 상태가 지속되면 국가가 유지될 수 없다. 영국은 구빈법을 포함한 빈곤 대응 관련 제도를 다듬어갔다. 산업혁명으로 빈부 격차가 확대된 이후, 국가의 역할에는 빈곤 퇴치가 추가됐다. 국가가 권력을 동원해서 싸워야 할 적은 침략을 도모하는 외부의 적성국가만이 아니었다. 내부의 빈곤도 적이 됐다. (중략)


국가의 역할 변화와 새로운 권력 분포     

초원복집 모임 참가자의 면면은 지난 세기 한국의 권력 지형도를 그대로 반영했다. 그리고 이처럼 권력 지형도를 잘 그려내는 재주는 어느 정권에서나 필요했다. 아니, 정부와 관계를 맺는 조직 모두에게 필수적이었다. 정부는 국가권력을 행사한다. 국가권력은 잘게 쪼개져, 공무원들에게 배급된다. 공무원들이 받은 권력 조각들은 크기가 제각각이다. 앞서 열거한 국가의 역할과 보다 가까운 일을 하는 공무원들일수록 큰 권력을 받는다. 군인들이 큰 권력을 누리던 시기는 국가의 역할 가운데 전쟁 대비 혹은 전쟁 치르기가 주로 부각되던 시절이다. 평화가 이어진 뒤론, 검찰과 경찰, 정보기관이 큰 권력을 누렸다. 정통성이 약한 정권을 위협하는 대상이 국가 안에 있던 시절이다.      


정부 내부의 권력이 이렇게 분포하므로, 정부를 상대하는 다른 기관 내부의 권력 분포도 비슷해졌다. 정당은 정부 권력을 잡는 게 목표다. 목표를 좆다보면, 정부의 권력 분포를 닮아간다. 그래서 정당 역시 검찰 등 법률 전문가들을 환영했다. 혹은 빈곤과 싸우기에 유리해 보이는 경제 전문가를 찾아다녔다. 언론은 정부 권력을 감시하는 일을 한다. 역시 정부 내부의 권력 분포를 닮아간다. 엘리트에 가까워 보이는 기자에게 법조 출입 업무를 맡기던 언론사의 관행은 그렇게 생겨났다. 정부, 정당, 언론의 이런 관행은 나름의 이유 때문에 생겨났으므로, 쉽게 바뀌지 않는다. 최근 언론사 법조 출입 기자들의 문화에 대해 비판 목소리가 나오지만, 개혁 방향에 대해선 뚜렷한 대안이 나오지 않는 한 배경이다. 국가의 역할이 지난 세기와 마찬가지라면, 한국은 여전히 거대한 초원복집이다. 검사 출신을 중심에 놓고, 경제와 교육이 주변에 서 있는 권력 지형도가 그려진다.


(중략) 21세기 권력 내부자들이 모인 자리 풍경은 다르기를 기대한다. 기대를 현실로 바꾸는 힘은 권력을 감시하는 시민에게서 나온다.           


성현석  언론인. 17년 남짓 기사를 썼습니다. 

앞으로는 다른 글을 써보려 합니다.      


위 글은 빅이슈 3월호 222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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