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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Jul 24. 2020

[황소연의 레트로즘] 90년대 여자들의 위인전

<프로는 말이 없다>


글. 황소연


‘옛날 책’ 구경은 재미있지만, 더 설레는 건 그게 여자들의 이야기일 때다. 몇 달 전 요리연구가 하선정에 꽂혀 그에 대해 검색을 한참 하다가 ‘세계의여성들’이라는 출판사를 발견했다. 더 놀라운 건 이 출판사에서 낸 책 제목이다. <프로는 말이 없다: 다만 일로써 승부할 뿐이다>.  강렬한 제목 아래 여섯 명의 여자들이 독자를 바라보고 있다. (중략) 시인 신달자, 행위예술가 임경숙, 배우 채시라, 안무가 최청자, 법무부 장관 추미애와 함께 세상을 떠난 요리연구가 하선정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1990년대 중반에 일가를 이룬 이들의 일상은 신선하다.     



여자들이 기록한 투쟁

몸담은 분야가 다른 만큼 저자들이 쓴 글의 분위기나 인생 전개는 상반된다. 그냥 사람 사는 얘기라기보다 산전수전 다 겪은 이들의 투쟁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신달자 시인이 풀어놓는 ‘샤넬 향수’를 선물 받은 들뜬 마음이나, 소설 <물 위를 걷는 여자>의 모티브가 된 독자를 만난 이야기는 분명 사업가로 왕성하게 활동한 하선정의 삶과는 다르다. 너무 다른 여섯 사람을 ‘프로’라는 키워드로 꿰어놓은 것 같다가도 시대를 관통하는 남아 선호 사상이나 여성의 사회 진출에 부정적인 편견을 경험한 이야기는 비슷하다. 


다섯 딸을 출산한 신달자의 어머니는 당신 스스로 ‘수치스러운 인생’을 살고 있다고 정의했다. 최청자는 첫아이로 딸을 낳았지만 시가로부터 아들을 낳을 때까지 아이를 계속 낳아야 한다는 어마무시한 지시를 들었다. 가까스로 둘째로 아들을 안긴 뒤에야 그는 마음 놓고 춤을 추고 공부한다. 자신 아래로 아들인 동생을 낳은 어머니가 세상 누구보다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신달자는 결심한다. 내 딸은 영광스럽게 여겨야겠다고. 세상 모두 여자가 부끄러운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전제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이다.


승승장구한 이야기만 기록되어 있지 않은 점도 특별하다. 물론 여섯 사람은 열심히 달려 성공을 쟁취했지만, 책에는 오히려 실패한 이야기도 많이 나온다. 뛰어난 실력을 가진 상태에서 출발해 좌절을 맛보는 순간들이다. 특히 프로가 되는 과정에서 여성들은 중요한 결정을 스스로 내리기 어려웠다. (중략)


부끄러운 것에서 영광스러운 것으로

시대가 만들어낸 특이한 장면도 많이 나온다. 당시 농림부로부터 분식 장려 운동에 동참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하선정 선생이 연탄불로 식빵을 만들 수 있는 배소식 식빵 기계를 만들었다는 사실이나 채시라가 탤런트로 데뷔하는 계기가 잡지 경품 응모였다는 점도 재미있다. 정계 입문 전, 10년 6개월간 판사로 일한 소회를 밝히는 현직 장관 추미애의 글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여성 운전자에게 유독 가혹한 도로 위에서 일부러 5년간 자가 운전을 한 일,  (중략)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법조계에 종사하며 겪은 일들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중략) 희망찬 이야기와 함께 여자들이 마주한 좌절을 보여주는 이 책을 읽으면, 여자 프로들의 말이 더 쏟아져 나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실패든 성공이든, 일로만 평가받을 그때까지. ‘여풍’이라는 말이 사라질 날까지 말이다. 더 많은 사람이 과거를 살아낸 이 여자들의 위인전을 읽길 바란다. 길을 닦은 여섯 프로들의 이야기는 지금 읽어도 분명 영광스럽다.           


위 글은 빅이슈 7월호 231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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