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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Jul 23. 2020

[서울게이행복주택] 어디 가도 잘 살 사람


글. 정규환

사진. 김찬영     



직장에서 만난 한 여자가 있다. ‘겉으로 굿 걸’들이 실제론 기가 세고, ‘겉으로 배드 걸’들이 사실은 유리 멘털을 가졌다는 밈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이었다. 디자인 업무를 담당하는 그녀는 화려한 패턴의 구제 셔츠나 원피스를 즐겨 입고, 드러나는 몸 군데군데 다양한 타투가 있었다. 그동안 직장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스타일이었고, 나 역시 장발이어서 우리 둘은 이 회사에 잘 적응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아싸’를 추구하는 면에서 피차일반인 듯했다.


나는 이 직장에 들어오기 전, 좋아하던 영화 일을 그만두고 2년간 쉬었다. 쉬었다기보다는 다른 진로를 찾았다. 그리고 새로운 분야에서 다시 일해야겠다는 결심이 섰을 때 ‘일과 사람에게 큰 기대는 말아야지’ 하고 마음먹었다. 남자 친구와 6년째 동거하면서 낯선 사람에게 굳이 나를 드러내거나 이해를 요구하지 않는 것이 평온한 삶을 위한 미덕이라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중략)


첫 회식 자리에서 그녀가 내게 대뜸 물었다. “혹시… OO 학교 다니지 않으셨어요?” 내 얼굴을 보고 출신 학교를 맞히다니 내심 놀라웠다. “풍물 동아리에서 활동하셨죠?”, “그럼, 아무개 아세요?” 그 뒤로 계속 나와 공통점을 찾으려고 애쓰는 그녀. 내 세계의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려는 그녀에게 나는 방어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아, 한 다리 건너 아는 사이일 수도 있죠. 하하하. 사회생활 하다 보면 흔한 일 아닌가요?” 그리고 그 순간 이 사람과는 가까워질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에야 나는 그저 친근감을 드러내는 그녀의 방식이었다고 회상한다. 현재는 그 상황을 두고두고 곱씹으며 당시 서로의 반응을 두고 놀린다.     



직장에서 만난 사람에게 어디까지

나를 드러내고 가까워질 수 있을까     

인권 단체에서 일하는 내 남자 친구 찬영은 종종 언론에 기고하는데, 이 기사들이 포털 사이트 네이버와 다음 메인에 올라가기도 한다. 그러면 수백 개에서 1000개에 이르는 댓글이 순식간에 달린다. 그 댓글의 약 90% 이상이 악플이고, 내용은 ‘제발 조용히 좀 살아라.’부터 ‘가스실에 가둬 죽이고 싶다.’까지 다양한 차별과 혐오 표현이 대부분이다. 누구보다 평범하게 사는 우리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왜 이런 말들을 들어야 할까?


멘털이 강하다고 생각한 나조차 이 댓글들을 아무 생각 없이 쭉 읽다가 체하고 말았다. 만약 언젠가 일을 그만두고 모아둔 돈이 떨어지면 이런 악플을 단 사람들에게 고소장 날려서 합의금으로 생활비를 벌어야겠다고 농담 반 진담 반 이야기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사적으로 이런 일이 있더라도 직장에선 굳이 이 이야기를 꺼낼 필요는 없다. 하지만 비밀스럽게 사회생활을 하다가도 종종 속마음을 터놓고 싶은 순간이 있다. 계획적인 성향의 나는 6개월 동안 천천히 그녀를 관찰했다. 그리고 자연스러운 커밍아웃을 위해 지금 연재 중인 이 에세이를 그녀에게 보여준 뒤 내 TMI를 오픈할 수 있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우리를 비난해서 속상하다고 털어놓았더니 공감 수치가 높은 그녀는 바로 눈시울이 붉히며 말했다. “그거, 규환 님 잘못 아니니까 상처받지 말아요.”


그런 그녀가 지난 6월 말 계약 만료로 직장을 떠났다. 나는 그녀와 함께 일한 시간이 진심으로 즐겁고 행복했다. 서로의 집에 초대하고, 내 남자 친구와 반려동물 흰둥이를 위한 선물을 받고. 어찌 보면 일상에서 동료들과 주고받는 당연한 행동이 더 특별하고 감사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이 사회는 힘없는 사람들의 연대 고리를 끊어놓는다. 비정규직의 설움을 공유하며 정들었던 동료들을 몇 개월 주기로 차례차례 떠나보낸다. 언젠가 내 차례도 오겠지. 이제는 어디서 무얼 하며 잘 살고 있는지 알 수 없고, 구태여 몇 번 만날 수도 없는 사이가 되는 것. 인간은 작별 앞에서 한없이 겸손하고 감사한다. (중략)


누구와도 필요 이상으로 친해지고 싶지 않고, 기대와 상처 따위 주고받고 싶지 않던 내게 서로를 갈라놓는 이 세상에서 좀 더 나를 드러내고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힘을 불어넣어주던 그녀. 나는 그녀가 어디 가도 잘 살 사람이라고 확신한다.     


정규환  

프리랜스 에디터. 20대의 절반 동안 영화사, 영화제 등에서 각종 아르바이트를 섭렵했다. 매거진 <GQ>, <뒤로>, ‘앨리바바와 30인의 친구친구’ 등에 성소수자 관련 에세이를 기고했다. 인권 운동을 하다가 만난 게이 파트너와 5년째 동거 중이다.


위 글은 빅이슈 7월호 231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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