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양수복
“뭐 먹고 싶어?” “집밥.”
기숙사와 원룸을 전전하던 자취생 시절, 집밥은 요원한 존재였다. 식재료도, 변변한 조리 도구도 없고, 주방이 아예 없거나 방과 구분할 수 없이 좁은 집은 밥을 짓는 장소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 거취가 모호하고 어감이 짠한 ‘자취생’이 아니라 어엿한 ‘1인 가구’로 정체성을 확보하고 난 뒤에도 나는 집밥을 지을 수 없었다. 뒤집개, 스패출러, 계량컵. 요리 빈도에 비해 쓸데없이 많은 조리 도구, 장바구니를 한가득 채울 만큼 커진 씀씀이, 검색만 하면 쏟아져 나오는 레시피, 그리고 부족한 맛을 보완해줄 요리 에센스라는 묘수까지 생겼는데도 말이다.
내가 집밥을 만들 수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집밥은 내 손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중략) 김치찌개를 끓이려고 해도 엄마 집에서 가져온 김치가 있어야 하고, 그날의 메인 요리 옆을 장식하는 장아찌나 멸치볶음 따위의 반찬도 본가에서 공수해야 한다. 집밥은 ‘엄마의 손맛’이라고 쓰고 ‘노동력’이라고 읽는 다.
궁지에 몰린 마음을 밥처럼 씹어라
보건복지부가 19세 이상 성인의 하루 1회 이상 외식률을 조사한 결과, 한 끼니 이상 밖에서 먹는 비율은 2012년 25.6%에서 2018년 33.5%로 늘었다. 외식이 보편화될수록 한국인의 잘 차린 집밥에 대한 환상은 더 커져만 간다. 오죽하면 <집밥 백선생>, <집밥의 여왕> 같은 프로그램이 방영될까. 남이 잘 차린 밥상을 대접받는 장면을 보며 대리 만족을 느끼는 걸까. 그러나 꼭 집에서 차려 먹어야 맛 좋고 영양소 알찬 진정한 식사, 밥다운 밥일까. 누군가의 노동력을 집에서 무보수로 쓰고 싶은 마음을 정성, 손맛으로 포장하는 건 아닐까.
환상 속의 집밥과 실제 집밥은 다르다. 실제 집에서 자주 해 먹는 한 그릇의 음식, 라면은 집밥이 될 수 없다. 소박하고 영양과 정성이 가득 담긴 집밥은 실은 밥과 국, 메인 요리 한 가지를 비롯해 콩자반, 멸치볶음, 김치, 애호박무침같이 우리가 기본 찬이라 부르는 서너 가지 밑반찬이 구비된 식탁이고, 이것을 달리 말하면 한정식 식당의 식탁이다. 식당에서야 다인분의 요리 재료를 준비하고 한꺼번에 수십 인 분을 요리하지만, 집에선 기껏해야 2~3인 분의 식사를 위해 5첩, 7첩 반상을 차리는 것 자체가 크나큰 수고다. 그래서 나는 쉽게 한 그릇의 음식, 레토르트 음식이 대표하는 ‘가짜 집밥’ 혹은 외식을 선택한다.
영화 <카트>에서는 파업 중 가족들의 밥을 걱정하는 여성 노동자를 비춘다. 지난 3월 《빅이슈》와 인터뷰한 도명화 민주노총 민주연합노조 톨게이트지부장 역시 파업 중간에 밥해놓고 가라는 남편들이 있었고, 파업 기간이 길어져 불만이 커진 가족들을 달래고 오느라 “더 홀쭉해졌다”고 여성 노동자의 이중 과업을 지적한 바 있다.
몇 날 며칠을 집에 못 들어가는 와중에도 가족들의 밥을 챙겨야 하는 게 여성인데, 올해를 강타한 코로나19는 이들을 집 안으로 몰아넣었다. 올해 3월 CJ제일제당이 소비자 1000명을 조사한 결과, 집에서 식사를 직접 조리하는 비율이 늘었다고 응답한 사람이 84.2%에 달했다.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된다면 직접 조리하는 비율을 늘릴 것 같다고 응답한 사람도 77.5%나 됐다. 주 양육자이자 가사노동 부담 비중이 큰 여성들이 학교에 가지 않는 아이, 재택근무 하는 배우자를 위해 끼니를 차리느라 더 많은 시간을 부엌에서 보내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절약한 출퇴근 시간을 밥 짓는 데 쓰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밥은 중요하다. 나는 삶이 서럽게 느껴질 때면 천양희 시인의 <밥>이라는 시를 읽는다. ‘외로워서 밥을 많이 먹는다는 너에게/ 권태로워 잠을 많이 잔다던 너에게/ 슬퍼서 많이 운다던 너에게/ 나는 쓴다/ 궁지에 몰린 마음을 밥처럼 씹어라/ 어차피 삶은 너가 소화해야 할 것이니까’
이제는 내가 꾸역꾸역 집어 먹는 밥을 차리는 사람을 상상한다. 그 사람은 엄마였다가, 집과 학교를 오가며 밥 차리는 급식 노동자였다가, 귀찮아 죽을 것 같아도 살기 위해 끼니를 챙기는 내가 된다. 더 이상 집밥 먹고 싶다고 말하지 않기로 했다. 차려주는 밥을 먹고 싶다는 말이 내포하는 의미를 알아버렸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