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사진. 김민성
종이책은 죽었다. 잡지도 곧 사라질 것이다. “한국 출판계는 거의 자멸의 방향으로 기울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불황에서 허덕이고 있다.” 이 문장은 1955년 1월 23일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 제목이다. 그러니까 65년간 한국 출판계는 죽어가는 중이다. 누군가가 나를 보며 “32년째 죽어가고 있는 당신은 곧 죽을 거요!” 외친다. (중략)
죽음은 인류의 탄생부터 현재까지도 풀리지 않은 숙제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이 죽음을 대비하는 훈련이라 말했다. 그는 영혼이 불멸한다고 믿었고, 자신의 철학을 공부해야 죽음이 아닌 영혼의 이동에 대비할 수 있다 속여 사람을 모았다. 스토아학파는 죽음에 대비하기 위해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주장한다. 그 유명한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다. 스토아학파는 죽음에 대한 오해 때문에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한다고 믿었다.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삶을 잃는 슬픔도 잘 대비할 수 있을 거라 주장했다. (중략)
물론 세상에 영원히 살 것이라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머리로는 다들 알고 있다. 하지만 상상해보자. 내일 죽는다면 어떨까. 사랑하는 존재가 눈앞에서 죽는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그 광경을 떠올리다 눈물이 나고 속이 뒤틀려 진짜 죽어버릴 거 같아 상상을 그만두기로 한다. 죽음을 떠올리는 건 언제나 두렵고 고통스럽다. 아무리 죽음을 다룬 글을 많이 읽고 성찰해 삶의 유한성에 대해 깨닫고 있는 철학자라고 하더라도 눈앞의 부모나 연인의 시체를 바라보며 아무렇지 않게 삶의 유한성을 이야기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은 경구가 담긴 책이라도 불타거나 찢어져, 버려지는 종말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다만 오늘의 종이책에 집중할 뿐
(중략) 자신에게 주어지는 건 죽음의 형태가 아닌 과정뿐이다. 하루하루 더 열심히 살자는 뻔한 소리가 아니다. 사실 열심히 살면 살수록 과로와 스트레스로 인해 점점 죽음은 가까워져올 뿐이다. 그저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유한하며, 평생 모든 것은 엉망일 것이고, 어떠한 소원도 온전히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는 진리를 말이다. 불가능한 내일을 욕망하고 모든 것이 완벽한 미래를 바라는 대신 가장 의미 있는 오늘을 집중하자는 뜻이다.
다시 돌아와 종이책과 잡지의 운명에 대해 떠올려본다. 60년도 넘는 세월 동안 우리는 종이책과 잡지의 종말에 대해 두려워하며 떨고 있다. 60년은 꽤 긴 세월이다. 그동안 수많은 존재가 태어나고 죽었을 것이다. 그 안에서 수많은 작가, 편집자, 출판사가 탄생하고 사라졌으며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독자가 사라지고 탄생했다. 그중에 출판계의 호황을 위해 쓰는 작가나 책이 사라질 거라는 두려움 때문에 읽은 독자는 몇이나 될까.
관성적인 또는 습관적인 종말론에 가려져 현재를 분투하고 사는 수많은 쓰는 존재와 읽는 독자를 떠올려본다. 모두가 오늘을 위해 쓰고 읽는다. 쓰는 존재는 출판계의 미래가 아닌 지금, 이 순간 이야기할 것에 관해 쓴다. 읽는 독자는 내일의 두려움이 아닌 단지 오늘의 즐거움을 위해 읽을 뿐이다.
시대에 반하는 글을 쓰면 목이 잘리고 목숨을 담보로 읽어야 하는 시대에도 누군가는 쓰고 누군가는 읽었다. 어떤 형태로든 무슨 방식으로든 언어를 쓰고 읽는 행위는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이런 믿음과 기쁨도 잠시. 삶의 모든 진리를 알고 있다는 선지자가 나타나 외친다. “이제 곧 종이책은 죽을 것이다! 잡지도 사라질 것이다!” 한마디 보태본다. 나도, 당신도 곧 그렇게 될 운명이다. 하지만 어떻게 죽을지는 나도, 당신도 아무도 모른다. 그저 살아 있는 오늘을 기억할 뿐. 이제 다음 마침표를 끝으로 이 글도 사망한다.
김민성
‘종이잡지클럽’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