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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Oct 12. 2020

진솔함의 방법

글/ 심규혁


오랫동안 메일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 계정은 휴면 상태가 된다. 그렇지만 해당 회사가 망하지 않는 한 간단히 되살릴 수가 있다. 서랍 속에 모아둔 편지와는 달리, 먼지 하나 쌓이지 않고 방금 받은 메일처럼 다시 볼 수 있다.

고백하자면, 나는 뒤를 잘 돌아보지 않는 편이다. 어쩐지 중학교를 졸업하면 중학교 친구들과,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고등학교 친구들과 연락이 싹 끊기는 편이었다. 시간이더 지나 대학교 역시 마찬가지였고, 아르바이트 장소가 바뀌면 이전 장소에서 아무리 친했어도 다시 잘 안 보게 되는 식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오래도록 고등학교 동창이나 군대 동기들과 정기적으로 만나기도 하지만, 나는 연락이 닿는 고교 동창조차 두세 명정도에 지나지 않는 지경이다. 그나마도 대체로 얼굴은 못 본다.

비슷한 맥락으로 나는 같은 책을 두 번 읽는 경우가 거의 없다. 영화나 공연 등도 마찬가지다. 일기도 꾸준히 써온 편이지만 다시 읽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당연히 학창 시절에는 ‘복습’을 특히 싫어했는데, 유경험자로서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복습을 싫어하면 공부는 잘할 수 없다.

늘 뒤돌아보지 않는 글쓰기를 하다가 에세이를 기고하게 된 덕분에 어쩔 수 없이 내가 써놓았던 글이나 메일 따위를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다. 오래전에 받았던 중요한 메일이 하나 생각나서 며칠 전에는 오랫동안 휴면 상태로 잠들어 있던 ‘다음’ 메일을 깨웠다. 이 계정을 마지막으로 깨웠던 게 2013년 <언어의 정원> 녹음을 앞둔 때였으니,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때는 연기를 위해 우울하고 막막한 감정들을 곱씹어보려고 일부러 옛날 이메일을 찾아본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중요한 메일 하나를 찾으려다가 그만 스물, 스물하나에 내가 다른 이들에게 보냈던 이메일 꾸러미를 우연히 펼쳐보게 됐다.

옛날에 내가 받았던 이메일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내가 보냈던 이메일은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전자는 ‘내가 좋아하는 이는 결코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쪽을 건드렸다. 그런데 후자는 상대가 왜 나를 안 좋아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일깨움으로써 나에 대한 깊은 회의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메일 속의 나는 매번 다른 사람 같았다. 어떤 때는 괜히 쿨한 척을 했고, 어떤 때는 매달렸다. 굉장히 어른스러운 척을 하다가 한순간 칭얼댔다. 진지해 보이려 용을 쓰다가 별안간 유머러스함을 내보이려고 애썼다.

‘다음’ 이메일을 쓰던 때의 나는 참 엉망이었다. 나는 편지를 쓰면서 나의 엉망인 부분을 감추려 하고 있었다. 직접 써놓진 않았지만 지금 다시 읽어보니 스스로를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 훤하게 보였다. 나는 나를 알리고 드러내는 글이 아니라, 어딘가를 자꾸만 가리고 감추는 글만 잔뜩 남겨놓았다. 그 모습이 딱했다. 슬플 정도로 말이다.


누구든 진솔해야 한다

이제 난 목소리 연기를 하는 사람이 되어 있다. 연기자마다 어떤 연기가 옳은지, 어떤 연기가 더 좋은 연기인지에 대한 철학이 다양하겠지만, 초석은 같다고 본다. 그 위에 무엇을 쌓고 덧입히든 우선은 그 목소리가 진실되어야 한다. 진솔해야 한다. 그것은 어떤 기교나 술수로 해결되지 않는다. 진솔함을 얻는 방법이 있을까?

매일매일 얼굴이 바뀌는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영화 <뷰티 인사이드>의 주인공 우진은 어떤 날은 미청년의 얼굴이, 어떤 날은 노인의 얼굴이, 어떤 날은 어린아이의 얼굴이 된다. 그의 연인은 그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그럼에도 그녀의 마음은 병들어간다.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매일 새로 익혀야 하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신인 때 아홉 번 연달아 오디션에 떨어진 적이 있다. 그런 상황에서 나에게 첫극장판 애니메이션 주연을 맡겼던 피디님의 새 작품 더빙 오디션이 잡혔다. 보안 때문에 작품과 배역을 미리 알려주지 않은 채 현장에서 바로 스크립트를 받고 연기하는 식으로 진행된 오디션이었다. 현장에 가서 보니 욕심이 나는 영화에 욕심이 날 만한 배역이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느낌이 좋지 않았다. 현장에서 피디마저도 큰 기대는 하지 말라고 할 정도였다. 이번에 또 떨어지면 열 번째. 수렁에 빠진 기분이었다. 며칠 동안 뭐가 문제일까 머리를 싸매다가 그 피디님에게 조언을 청했다. “내가 보기에는 그래. 배역마다 새로운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에 네가 이만큼 온 것도 사실이야. 하지만 어느 정도 연차가 쌓이면 연출자가 그 성우를 부를 때는 이전의 레퍼런스를 갖고 기대하는 부분도 있거든. 그런데 매번 이전과는 생판 다른 모습만 보인다면 조금 곤란하지 않을까? 다양한 것도 좋지만, 네연기의 베이스캠프는 있어야 해. 그래야 너를 부를 이유가 생기지.”

그날 방구석에 앉아 그간 주연을 맡았던 작품들을 주욱 돌려보았다. <터보>, <언어의 정원>, <빅 히어로>, <박스트롤>, <괴물의 아이>… 정말 다양한 성격의 주인공들이었다.

그 작품을 맡았던 순간들을 다시 떠올리며 그 목소리들을 기억해보았다. 놀랍게도 잘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가 냈던 목소리와 말투인데도 생소했다. 분명히 내가 밟아온 발자국인데 발을 대보니 맞지 않는 느낌이었다. 뒤돌아보기를 참 싫어하던 나는 어제의내 목소리를 기억하기 어려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뷰티 인사이드> 우진의 목소리 버전이랄까.


뒤돌아본다, 존재하기에

진솔함은 어쩌면 일관성일지 모른다. 일관성을 갖기 위해서는 뒤돌아보아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늘 당신을 만날 때 어제와 같은 사람이길 원한다. 나는 매일 얼굴이 바뀌는 우진이 결코 부럽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는 정말정말 싫어하던 복습을 억지로라도 하려고 애썼다. 읽었던 책도 다시 읽고 옛날 일기장도 펴보고 사춘기 때 보았던 영화도 다시 구해서 본다. 그러다 보니, 잊고 싶었던 내 모습마저 다시 마주치게 되지만 나쁘지 않다.

외국 작품의 더빙 오디션은 본사에서 결정한다. 그래서 때로는 한국어 더빙 피디의 예상과 다른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금쪽같은 조언으로 나를 구해줬던 그 피디에게서 얼마후 연락이 왔다. “그 배역, 네가 됐다네. 축하해. 잘 해보자.”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 새로 등장한 톰 홀랜드의 스파이디였다. 그 후로 톰홀랜드의 작품을 많이 더빙했다. 많은 이들이 그냥 당연히 내가 한 줄 알지만, 매번 다시 오디션을 봤다. 이 세상에 종신 보장은 없다.

뒤돌아본다. 복습한다. 공부가 문제가 아니다. 존재의 문제다.


심규혁

10년 차 성우. 디즈니 어벤저스 시리즈의 <스파이더맨>, 영화 <콜미 바이 유어 네임> 엘리오, <알라딘>의 알라딘과 애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치아키와 MOBA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의 에코 목소리를 연기했다. 일을 할수록 목소리는 좋아지는데 뇌가 퇴화되는 것 같아 글쓰기로 치료 중이다.


위 글은 빅이슈 9월호 236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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