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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Oct 12. 2020

낮의 시놉시스

글/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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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인상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이 자연주의적 의미로 완벽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스크린에 등장하는 것이 본질적인 것만 포함하고 있다면, 실생활에서는 존재했을 모든 종류의 것이 생략되어도 무방하다. 

– 루돌프 아른하임


1

낮에는 주로 뭘 하시죠? 의사가 물었다. 요즘은 구름을 봐요. I가 말했다. 요즘은 구름을 보는군요? 네, 공원에 앉아서요. 비나 눈이 오는 날에는? 우산을 챙기죠. 모자를 써요. 도서관도 좋아요. 그리고 구름에 관해 씁니다. 저는 ‘오늘의 구름’을 기록하는 사람이니까요. 구독하는 사람이 많나요? 아무도. 그야말로 일기니까요. 구름은 우울한가요? 무기력에 가깝죠. 자기를 무기력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구름을 보는 사람은 대개 그렇죠. 구름에서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건 구름은 쉴 틈 없이 계속해서 흘러간다는 거예요. 혼자 지내세요? 아마도. 혼자에 가까운 상태로요. 저는 밤에 잠들고, O는 낮에 잠들어 있어요. 한번은 잠든 O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본 적이 있는데, 사랑하고 있더군요. 깊은 꿈속 작은 오두막에서. 꿈에 연인이 없는 사람은 없잖아요. 그런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죠. 저는 O가 불행하길 바라지 않아요. O 역시 제가 불행하지 않길 바랄 거예요. O도 잠든 제 얼굴을 본 적이 있겠죠. 알 수 있어요.

그런 날이면 O는 더 빨리 더 깊게 잠이 들거든요. 죄책감에 사로잡혀서. 왜냐하면 저는, 제 깊은 꿈속 작은 오두막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은 바로 O니까요. 밤에는 주로뭘 하시죠? 의사가 물었다. 요즘은 한 사람을 생각해요. I가 말했다. 요즘은 한 사람을 생각하는군요? 네, 책상에 앉아서요. 비나 눈이 오는 날에는? 음악을 챙기죠. 라디오를 켜요. ‘Two Sleepy People’. 그리고 한 사람에 관해 써요. 제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에 관해서요. O가 단 한 번 만났을 뿐인 사람에 관해서요. 일기 같은 건가요? 아마도.

소설이기도 해요. 그야말로 순전히 저의 상상만으로 만들어진 인물이니까요. Y는 ‘뮤리엘’이라는 이름이 붙은 작은 레스토랑의 주방에서 일해요. 음식 재료를 준비하거나 설거지를 하죠. 허드렛일을 하는 거예요. 가난한 노동자. 밤에는 버드와이저를 마시며 탐정 소설을 쓰죠. 재능은 없어요. 재주가 좋은 편도 아니죠. 그런데도 매일 써요. 그러다 보면 뭐가 돼도 되죠. 다 때가 있는 법이니까. 그가 쓰는 소설엔 매력적인 탐정 X와 실종과 죽음, 미스터리한 여인 Q가 등장하죠. X는 단 한 번도 사건을 해결하지 못해요.

사건을 해결하는 건 언제나 그의 조수 Z죠. X는 사건보다는 사건을 성립하게 하는 것들에더 관심이 많거든요. 이를테면 운명적인 만남과 ‘작은 마리아에게’라고 적힌 편지 한통. 혼잣말.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아니라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 치정과 복수. 덧없게 끝나는 엔딩. 흘러가는 구름. 밤에는 할 말이 많아지는군요. 의사가 말했다. 낮에는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게 되어 있잖아요.


2

I와 O는 오래된 연인이다. 그들이 몇 년을 함께 지냈는지, 그들이 과거 어떻게 사랑에 빠졌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연인이라는 것 말고는. 사랑에 있어 가장 시시한 일화는 대개 시간과 연관된 것이다. 영원을 약속한 사랑이 깨어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이제 이런 식의 이야기를 들으면 누구나 콧방귀를 뀐다. 그럴 줄 몰랐니? 하며. 재미를 위해서라면 차라리 이렇게 쓰자. 두 사람은 함께 살며 서로를 아낀다. 서로에게 말하지 못한, 끝내 말하지 못할 비밀을 한두 가지쯤 가지고 있고. 비밀이 없는 연인이란 얼마나 지루한가.

I의 비밀은 그를 서서히 잠식한, 조금은 광적인 수집증에서 비롯된다. I는 어려서부터 병뚜껑이나 우편엽서, 조가비나 새의 깃털 같은 걸 모아두길 좋아했다. 이제 그가 모으는건 그런 아기자기한 종류의 것이 아니다. 그는 좀 더 냉정하고 괴상한 것들, 반쯤은 어린아이 같고 반쯤은 늙은이 같은 취향의 것들. 이를테면 동물의 뼈와 연인들의 잠든 얼굴.

O의 비밀은 결벽증에서 기인한다. 그가 이제 막 사랑에 눈뜨기 시작했을 때부터 찾아온, 조금은 광적인 청결함. O는 그의 침실로 들어선 모두를 새하얗게 질리게 했다.

그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그 밖의 모든 것들로. 새하얗고 또 새하야며 새하얀 물체들로. 이제 O는 ‘비밀 피크닉 바구니’에 식기를 담아 다니지 않고 장갑을 끼고 식사하지 않으나, 하얀 눈 위에 떨어진 새빨간 버찌 한 알을 발견하면 주저 없이 그것을 눈으로 덮는다.

어쨌든 I와 O는 이제껏 그랬듯 앞으로도 수십 년을 함께하며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유언장과 추도사를 동시에 작성하는, 그렇고 그런 커플들과 다름없는 인생을 살게 될것이었다. O가 그날, 마리앙바드의 해변 마을에 가지 않았다면, 목소리박물관을 방문하지 않았다면, 폭탄이 터지지 않았다면, Y가 O를 향해 미소 짓지 않았다면. 그리고 O는 끝끝내 실종된다. 자발적으로. I를 떠나는 대신에. I를 멀리하기로 한 채. Y에게로 가지 않고. 자신의 타오르는 사랑을 눈으로 덮어버리는 방식으로. Y를 찾아가는 것은 I이다.

I는 Y를 사랑하게 된다. O를 사랑하기 위해서. Y는 더는 O를 만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I를 사랑하게 된다.

이제 I와 Y는 오래된 연인이다. 그들이 몇 년을 함께 지냈는지, 그들이 과거 어떻게 사랑에 빠졌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연인이라는 것 말고는. 그리고 어느 날 밤에 O가 I와 Y 사이로 끼어든다. 사랑에 있어 가장 흥미로운 일화는 대개 사라진 시간과 연관된 것이다. 그러니까 영원한 사랑의 빈구석. 한순간의 불신과 증오와 저주 그리고 무엇보다 재회.


3

마르그리트 도나디외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본명) 는 욕조에서 꿈을 꾸고 있었다. 깊은 숲속, 작은 오두막. 세 사람이 한 침대에서 이제 막 사랑을 나누려고 할 때, 그녀는 오두막 아래 깔린 연약한 건초 더미에 성냥불을 던져둔다. 밤에, 사건을 벌이기 위해서.


김현

읽고 쓰고 일한다. 시집으로 <글로리홀> <입술을 열면>, 산문집으로 <걱정 말고 다녀와> <질문 있습니다> <아무튼, 스웨터> <당신의 슬픔을 훔칠게요> <어른이라는 뜻밖의 일>이 있다.


위 글은 빅이슈 9월호 236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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