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빅이슈코리아 Nov 11. 2020

빨래를 말린다

글 | 사진. 이향규


일기예보를 보니, 내일은 흐리고 모레부터 매일 비, 비, 비, 비가 온다. 호사롭게 누린 여름 햇살은 이제 기억에만 남아 있다. 내년 봄까지는 축축하고 음산한 날이 이어질 터다.     

 

냄새

내가 영국의 여름을 사랑하는 이유의 8할쯤은 빨래 때문이다. 마당에서 바삭하게 마른 빨래를 걷을 때 손끝과 얼굴에 훅 닿는 냄새, 그게 좋아서 올여름에도 매일 빨래를 했다. 그 냄새는 햇볕과 바람의 자취다. 바람의 몫이 대부분이다. 햇볕이 물기를 거둬가는 동안, 바람은 옷감을 흔들며 올 사이사이에 지나간 흔적을 남겨놓는다. 남겨진 것은 플라스틱 통에 담긴 섬유 유연제의 ‘은은한 코튼 향’ 따위는 절대로 흉내 내지 못할 냄새인데, 이걸 묘사할 낱말이 마땅치 않다. 청량한, 투명한, 따뜻한 (혹은 서늘한), 깨끗한, 아련한, 이런 말들이 머릿속을 떠도는데 이걸 다 합친 것 같기도 하고, 정작 중요한 것을 빠뜨린 것 같기도 하다. ‘깨끗한 먼지’ 냄새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그 안에 시간이 담겨 있어서 그런가 보다. 내가 아이였을 때 아파트로 이사하기 전 엄마도 할머니도 다 계셨을 때, 그러니까 아주 오래전에 마당에서 말린 홑청을 새로 씌운 이불을 턱 끝까지 당겨 덮었을 때 나던 그 냄새다. 잊고 있었는데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천 개의 바람

빨래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만든다. 존재한다는 것은 알지만 모습은 보이지 않는, 예컨대 햇볕과 바람도 빨래를 통해 그 형체를 드러낸다. 그건 물 잔이 물의 형태를 잡아주는 것과 비슷하다. 

빨래는 이 세상을 떠났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을 곁에 불러오기도 한다. 그것도 바람이 매개하는 일이다. 노랫말이 그 사실을 알려줬다. ‘천 개의 바람이 되어(A Thousand Winds)’이라는 노래 덕분에 나는 엄마도 아버지도 할머니도 내 곁에 부는 바람으로 남아 있다는 걸 안다. (이 노래는 한국에는 세월호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곡으로 널리 알려졌다.) 노래는 이렇게 시작한다. ‘내 무덤 앞에 서서 울지 말거라. 나는 거기 없단다. 잠들지도 않았어. 나는 천 개의 바람이 되어 불고 있단다. 나는 눈 위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잘 익은 곡식을 비추는 햇빛, 부드럽게 내리는 가을비란다…’ 빨래를 널고 마당에 우두커니 앉아서 머릿속으로 노랫말을 계속 만들었다. 떨리는 나뭇잎에도, 새털구름에도, 빨래 위에 앉은 햇살에도, 널어놓은 베갯잇을 흔드는 바람에도 나는 머물러 있단다. 그러니 슬퍼하지 말거라. 염려하지 말거라.


구획

빨래는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게 할 수도 있다. 영화를 보면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벌판에 하얀 이불보 같은 빨래가 여러 겹으로 널려 있고, 두 사람이 흔들리는 장막 사이를 엇갈리며 서로 찾는 장면이 나올 때가 있다. 두 사람의 관계에 따라 로맨스, 스릴러, 심지어 호러물도 찍을 수 있다(호러물은 그러다 하얀 천이 빨갛게 물든다). 빨래가 만들어내는 벽은 다 보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다 감추지도 않는 그런 것이다. 그래서 얽힌 사람들의 관계에 따라서 적당히 안심하고 적당히 긴장한다. 

우리 집 마당에서는 옆집 마당이 환히 보인다. 그 집에서도 그럴 것이다. 나무로 엮은 낮은 울타리는 소리도 시야도 가리지 못한다. 우리는 옆집 이웃과 그런대로 잘 지내는 편이다. 그 집에는 엄마 둘과 어린 딸 둘이 고양이 두 마리와 개 한 마리, 토끼 두 마리와 같이 산다. 나는 김치를 담그면 옆집과 나누고, 옆집 사람들은 쿠키를 구우면 우리 집에 가져온다. 좋은 이웃이지만, 그래도 어떤 날은 옆집 사람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마당에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 날은 식탁보나 이불보 같은 것을 빨아서 나무 울타리 가까이 있는 빨랫줄에 길게 널어둔다. 그러면 저쪽에서도 내가 보이지 않으니 괜히 서로 인사하지 않아도 된다. 어제도 그런 날이었다. 우리 집으로 건너온 옆집 고양이와 우리 집 고양이가 장막을 사이에 두고 한참 서로 기색을 살폈다. 비무장지대의 초병처럼 그러고 있더니, 어느덧 둘이 뒹굴고 논다. 빨래가 쳐놓은 구획은 바람에 흩어질 만큼 허술하다. 관계도 그만큼이 좋다. 경계가 너무 견고하지도, 활짝 열어젖히지도 않은 상태가.      


건조

나는 뒷마당에 빨래를 말릴 수 있는 지금의 사치를 당장 누릴 수 없는 사람에게는 조심스럽게, 누릴 수 있는 사람에게는 자랑하며 말한다. 조심스럽게라도 말하는 것은 누군가 기억 저편에 있는 바람 냄새를 떠올리며 기분이 좋아지기를 바라기 때문이고, 또 아직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언젠가 마당에서 잘 마른 빨래를 걷을 때, 코에 대고 숨 한번 들이마셔보라고 권하고 싶기 때문이다. 마당 있는 집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냥 이야기한다. 이게 얼마나 기분 좋은 경험인지는 그들도 알 거라고 생각하며. 

인연이 닿아 미국 보스턴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 만난 한국 사람들에게도 빨래 이야기를 했다. 우리 집 빨랫줄에서 흔들리는 옷과 파란 하늘 사진도 보여줬다. 모임이 끝나고 어떤 사람이 물었다. “그런데… 집에 건조기가 없어요? 왜 빨래를 마당에…?” “빨래 너는 거 도시 미관상 불법 아닌가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아… 불법은 아닌데…” 하고 궁색하게 답했지만, 또 확인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똑같은 생각을 하고 사는 것은 아니다. 

가을이 깊다. 해는 나지 않지만 비만 오지 않으면 마당에 빨래를 넌다. 종일 부는 바람이 젖은 옷을 반쯤 말려놓으면 저녁에 걷어서 건조기에 넣는다(우리 집에도 있다. 건조기). 이렇게 지낼 날이 한참 남았는데, 나는 봄이 돌아오기를, 쨍한 해가 다시 비추기를, 훈훈하고 마른 바람이 불기를, 벌써부터 기다린다.      



이향규/ 남편과 두 딸,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영국에서 산다. 한국에서는 대학과 연구소에서 일했다. 지금은 집에서 글을 쓴다. <후아유>, <영국 청년 마이클의 한국전쟁> 같은 책을 냈다. 소소한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