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3월 28일부터 서머타임(일광절약시간)이 시작되었다. 첫날, 어제 시간으로 7시에 일어났는데, 핸드폰 시계는 8시를 가리켰다. 한 시간 손해본 기분이었다. 방, 거실, 부엌, 화장실을 돌며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떼어 분침을 오른쪽으로 한 바퀴 돌렸다. 화장실에 있는 시계는 며칠 전부터 멈춰 있었다. 새 건전지로 갈아주었다. 초침이 다시 움직였다. 이런 작은 물건도 제 기능을 하려면 시간을 맞추고 건전지를 넣어주는, 누군가의 손이 필요하다.
어릴 때 단독주택에 살았다. 집은 손이 많이 갔다. 아버지는 고장 난 곳을 잘 찾아내셨다. 전자제품은 물론, 전기 배선이나 하수도 배관까지 웬만한 것은 다 손수 고치셨다. 아버지를 닮았으면 좋으련만, 아쉽게도 나는 허술한 나사를 조이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다. 그래도 살면서 크게 불편하지 않았던 것이, 아파트에서는 그런 일이 있으면 관리사무소에 연락만 하면 되었다. 그게 얼마나 편리한 것인지 그때는 잘 몰랐다.
우리 가족은 지금 빅토리아 시대(1837~1901)에 지은 집에 산다. 연립주택처럼 여러 채의 집이 옆으로 죽 이어져 있는 테라스 하우스이다. 이런 형태의 주택은 19세기 후반에 이 지역에 철도가 건설되면서 노동자들이 살기 위한 집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벽돌 건물 외관은 옛날 모습 그대로이지만, 내부는 긴 세월을 거치면서 조금씩 개조되어 지금 모습이 되었다. 전기 배선, 전화선, 중앙난방, 이중 창, 인터넷 등이 처음부터 있었을 리 없다. 영국에는 이렇게 오래된 집이 많다. 다들 낡은 부분은 보수하고, 고장 난 것은 고쳐가면서 산다. 다 알아서 해야 한다.
보일러가 자꾸 꺼졌다. 샤워를 하다가 더운 물이 끊겨서 샴푸를 제대로 씻어내지도 못하고 나오는 경험을 식구들마다 한 번씩은 했다. 보일러 고치는 사람을 부르면 며칠 후 와서 버튼을 몇 개 눌러서 살려놓았다. 10만 원쯤 들었다. 얼마 후에 다시 꺼졌다. 그러면 또 사람을 불렀다. 결국에는 보일러를 통째로 갈았다. 천장에서 물이 샌 적도 있었다. 2층 화장실 하수관이 새서 아래층으로 물이 떨어졌다. 배관공을 섭외해서 방문 약속을 잡는 데 사흘이 걸렸다.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얼마 전에는 2층에 있는 딸아이 방의 낡은 유리창이 마당으로 떨어졌다. 사람을 불러 견적을 받는 데 일주일이 걸렸고, 창문 제작에는 3주일이 걸린다고 했다. 지금은 비닐봉지를 잘라서 창문을 막고 산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한국이 절실히 그리웠다. 한국에 살 때는 ‘사람을 부르는 것’이 너무 쉬웠다. 일단은 관리사무소에서 알아서 해주었고, 전기 기사나 배관공, 보일러 기사, 인테리어 업체 사장님을 부르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서비스는 신속하고 저렴했다.
어떤 이는 기계를 고치는 것도 “돌봄”이라고 부른다. “돌봄노동 영역은 가사 노동이나 사람 돌봄노동에 국한되지 않는다.”며 “생산과 소비에 포함되지 않는 설비 및 시설의 유지‧수리·정비 작업 등의 노동도 돌봄노동으로서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백영경, ‘탈성장 전환의 요구와 돌봄이라는 화두’, 황정아 외, <코로나 팬데믹과 한국의 길>, 창비, 2021)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사람도 사물도 돌봄이 필요하고 누군가 그 일을 한다. 우리 아파트를 돌봐준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텐데, 그때는 그게 너무 당연해서 그들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한국에서는 늘 바빴다. 돌아보면 그다지 중요한 일도 아니었는데, 왜 그리 매사에 단거리 달리기 하듯 전력 질주를 했는지 모르겠다. 하나 마나 한 회의 자료 준비하는 데도 최선을 다했다. 어느 날 새벽에 자료를 준비하러 일찍 일어났다가 쓰러져서 벽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친 적이 있다. 정신이 들었을 때 머리에서 피가 났는데, 컴퓨터를 켰다. 자료를 만들어 송부하고 응급실에 가서 머리를 꿰맸다. 어리석게도 그때는 귀신에 홀린 것처럼 일만 했다. 나 자신은 물론이고 아이들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다행히도 도우미 아주머니가 오셔서 우리를 돌봐주셨다. 10년 동안 그분이 우리 모두를 살렸다. 평생 갚지 못할 큰 빚을 졌다.
이제는 내가 가족을 돌본다. 하루 종일 바쁘다. 세 끼 밥을 챙기고, 설거지하고, 부엌을 정리하고, 집 안 청소를 하고, 빨래하고, 장을 보고, 남편 약을 챙기고, 고양이 밥을 준다. 고양이들이 애정을 갈구하는 눈을 하고 가는 길을 막고 누워 있으면 쓰다듬어줘야 한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사랑받고 싶어 한다.) 마당에 있는 꽃과 나무에 물을 준다. 하루가 다르게 번지는 잡초가 눈에 들어오면 쪼그리고 앉아 풀을 뽑는다.
마음이 산란해지면 김치를 담근다. 배추를 절이고 양념을 버무리는 과정은 마음을 비우는 수행 같다. 통에 담아 냉장고에 넣으면 큰 업적을 이룬 것처럼 보람도 있다. 때때로 아이들이 뭘 해달라고 부탁할 때도 있다. 어제는 큰애가 뒷머리를 잘라달라고 했다. “싱숭생숭하게 잘라주세요.” ‘똑단발’이 아니라 머리끝이 층이 지게 하라는 요청이다.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싱숭생숭하게’ 가위질을 해주었다. 한 달에 한 번 남편 머리카락도 잘라준다. 코로나19로 이발소와 미장원은 몇 달째 문을 닫은 상태이다. 다음 주에는 남편을 데리고 런던의 큰 병원에 가야 한다. 그건 하루 종일 걸릴 거다.
몇 년 해보니, 돌보는 일은 ‘전문직’인 것 같다. 많은 능력이 필요하다. 타인의 필요와 요구를 알아채는 뛰어난 감수성, 타인의 속도에 맞추는 인내심, 의식주 등 삶의 재생산에 관련된 다양한 지식과 기술, 시대의 변화를 학습하는 능력, 강건한 체력과 정신 건강이 요구된다. 아이들이 “이제 엄마는 ‘주부 백단’이 되었다.”고 말한다. 내 전문직 직업 능력이 레벨 업되고 있다는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직접 해보기 전에는 이 일의 어려움을 잘 몰랐다. 나도 ‘돌봄을 받고만 살았던 사람’이었으니 알 리가 없다.
“타인을 먹이고 씻기고 입히고, 기다리고 들어주고 살펴주는 돌봄노동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생명을 돌보는 일이 모두 그렇다. 그 일이 쉬워서 여성의 몫이 된 것이 아니라, 여성들이 해왔기 때문에 쉬운 일로 치부되어왔던 것뿐이다. 돌봄에서 면제된 사람들은 스스로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지 못한다. 일생 돌봄을 받고만 살아온 사람들이 알 리 없다. 그런데 노동의 가치를 평가하고 값을 매기는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채효정, ‘누가 이 세계를 돌보는가’, 미류 외, <마스크가 답하지 못한 질문들> 창비, 2021
한때 사람들이 ‘전업 주부’의 일을 “집에서 논다”고 표현한 적이 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집에서 아무 노동도 안 하고 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노는 게 아니다. 전문직 종사자로서 돌봄노동에 종사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너무 바빠서 놀 시간이 없다. 돌봄의 가치는 돌보는 사람이 매긴다. 나의 가치를 새로 매기고 있다.
글/ 사진. 이향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