는 우리 부모의 첫아이였다. 육아도 처음인데, 태어난 아이는 세 살이 넘어서까지 업어달라 보채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는데 질문은 많고 감정을 잘 표출하는 데다 요구 사항도 강하게 어필하는 아이였으니 엄마 입장에서는 울화통이 터질 일이 많았을 것이다. 우리 엄마 역시 성질 하면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사람인지라, 우리 집에서는 엄마와 내가 링 위에 올라가 카운터펀치를 날릴 때마다 요란한 불협화음으로 시끄러웠다.
나에 비해(아니, 나 때문인가) 순하기로는 어디가도 뒤지지 않게 자란 내 동생은 어른이 된 후에도 종종 말했다. “난 언니가 엄마한테 혼날 때마다 이해가 안 되더라. 별것도 아닌데 그냥 엄마 말 들으면 되지. 왜 쓸데없이 싫다 그래서 맞고 혼나지?”
가족 간의 다툼이 대부분 그렇지만 정말 사소한 것으로 시작해 감정이 틀어진다. ‘엄마는 맨날 그래.’ ‘너는 맨날 그래.’라며 그동안에 참고 쌓아두었던 것들이 봇물처럼 터져서 큰 싸움이 되곤 한다. 예를 들어 엄마가 싱크대에서 ‘빨간 다라이’를 가져오라고 하면, 나는 그게 어디 있냐고 물어 다라이를 가져간다. 근데 엄마가 말한 양푼은 다른 거였고 엄마는 그거 하나 제대로 못 가져오냐고, 뭐든지 내가 직접 나서야 한다며 ‘내 팔자야’라고 혀를 차며 화를 낸다. 알고 보면 엄마가 가져오라고 했던 ‘다라이’는 싱크대가 아니라 딴 데 있다. 나는 차근히 알려주지도 않고 심부름을 시켜놓고는 사람을 ‘멍청이’ 취급을 하니까 억울해 길길이 날뛴다. 암마 역시 말귀도 못 알아듣고 그 쉬운 심부름 하나 못하는 딸내미 때문에 화가 난다. 게다가 부엌에 가보니 그거 하나 찾는다고 온 부엌을 들쑤셔놓고 서랍도 다 열어놨다. ‘뭘 하나 시키면 일을 더 키우네, 넌 어쩌면 뭐 하나 똑 부러지게 못 하냐, 그러니까 성적도 그 모양이지.’까지 이어진다. 그럼 나는 ‘나중에 서랍 닫으려고 했어. 여기서 성적 이야기가 왜 나와? 엄마야말로 설명도 잘 못하고 왜 그래?’라며 억울해서 발을 동동 구르며 울먹인다. 엄마 입장에서는 별것도 아닌 일로 울먹이니 더 환장할 노릇이고.
그럼 모녀의 갑작스러운 싸움을 멀리서 지켜보던 동생은 속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아니, 그냥 알았어 엄마, 하면 되는 걸 왜 혼날 일을 만들지? 저게 싸울 일인가??’ 사는 게 고단하고 몸이 힘드니 엄마는 짜증을 만만한 자식들에게 풀었고, 그런 신세 한탄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법 없는 나 역시 분연히 일어나 ‘자식한테 왜 말을 그렇게 하냐. 욕 좀 하지 말라.’며 엄마와 다퉜다. 사실 이 예시는 진짜 있었던 일은 아니고 가족 간의 다툼이 대개 이렇게 사소한 데서 시작한다는 것을 설명하느라 만든 가상의 사건이다. 진짜다. 뭐, ‘빨간 다라이’ 비슷한 것 때문에 혼난 적이 있었던 것 같기는 한데 오래돼서 기억이 흐릿하다.
나는 잔소리를 가장한 엄마의 지청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엄마는 입만 열면 나를 지적하는 걸까. 칭찬보다는 비난을 하기 위해 시작되는 대화들이 더 많았다. 밖에 나가면 칭찬을 듣는데 왜 집에 오면 잔소리를 듣고 지적을 받는지, 청소년기가 되어 엄마를 이해하고 싶어서 가족 관계 책들을 여러 권 읽었지만 그럴수록 ‘역시 내 부모가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만 강해졌다. 나를 위해 하는 ‘잔소리’라고는 하지만, 가장 지지받고 싶은 부모로부터 쏟아지는 비판은 나를 뒷걸음질치게 했다.
그런데, 요즘은 내가 주로 엄마에게 그런 말을 한다.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다 엄마 좋으라고 하는 말인데 자식 말 좀 들으면 안 돼? 내가 그런 거 더 잘 알지. 엄마가 잘 알겠어? 인터넷에서 찾아보니까 영양제 그렇게 여러 개 섞어 먹지 말래. 내 친구의 남편이 약산데 물어보니 그렇게 아무거나 섞어 먹는 거 안 좋대.” 등등….
엄마와 멀리 떨어져 살다 보니 잔소리는 주로 전화로 행해진다. 엄마가 건강하게 오래 살았으면 좋겠는데 바쁘다고 건강검진도 제때 안 받고, 무릎 관절이 안 좋으면서 장사도 쉬지 않고 밤늦게까지 일을 하고 있으니 속이 터지는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좀 더 알게 되고, 엄마는 퇴화되는 부분이 있다. 예를 들어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 스마트폰을 잘 이용하지 못하는 엄마는 모든 정보에서 나보다 뒤처지게 된다. 나는 그까짓 검색 능력이 좀 더 발달했다는 이유로 엄마에게 잔소리를 한다. 내 기준으로 이게 더 좋은 건데, 내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이 살아온 경험에만 의존하려 하는 엄마의 결정이 답답해서 화를 내게 된다. 물론 처음에는 ‘설득’을 가장한 좋은 말로 시작한다. 하지만 아무리 각종 증거 자료를 제출해 엄마를 설득하려 해도 단단한 엄마의 성벽은 무너지지 않는다. 노인들은 자녀의 조언은 질색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만을 강화시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수십년 쌓인 나쁜 습관은 노력한다고 고쳐지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살아온 삶의 방식, 습관에 대해 젊은 사람이 지적하면 일부러라도 발끈해 그걸 더욱 사수하려 든다. 이런 대화 패턴이 반복되면 자녀 역시 이런 말이 절로 나오는 것이다. “아유, 엄마는 누굴 닮아서 그렇게 말을 안 들어? 진짜 속 터져 죽겠네.” 물론 늙었다고 사람 성격이 어디 가는 게 아니기 때문에 우리 엄마 역시 전화로 소리를 빽 지른다. “공부시켜놨더니 잘난 척하고 있네. 아유 시끄러. 내가 알아서 하니까 끊어! 돈도 못 버는 게 니 앞가림이나 잘해!”
아, 물론 이 역시 가상의 대화다. (여러분, 우리 모녀는 저렇게 막말을 주고받지 않습니다. 정말입니다.) 워낙 이런 통화가 비일비재해 엄마와 나눈 대화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기 때문에 대충 이런 대화를 나누지 않나? 하고 각색을 좀 해보았다. 나는 엄마가 내 말을 좀 따라줬으면 좋겠다. 1년에 단 하루도 가게 문을 닫지 않고 하루 열두 시간 이상 일만 하는 엄마의 건강이 걱정된다. 봄에는 남들처럼 꽃놀이도 가고, 같이 여행도 다니고 서울도 한 번씩 와서 경복궁도 보러 가고 비싼 호텔 뷔페도 함께 갔으면 좋겠다. 엄마가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도 함께 가고 싶다. 엄마의 시간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데, 그 시간을 즐기지 못하고 여전히 ‘일일일’만 하면서 관절과 생명을 갉아먹고 있는 게 안타까워서 속이 아프다. 근데 또 나에게 뭘 알려달라거나 뭘 좀 대신 신청해달라고 하는 건 귀찮다. 소상공인 재난지원금 신청 같은 것이 어려우니 대신 해달라거나, 스마트폰에 갑자기 이상한 애플리케이션이 깔렸으니 좀 지워달라거나, TV 리모컨 사용법이 어려우니 알려달라거나 하는 건 귀찮은 것이다.
얼마 전, 트위터에서 딸에게 스마트폰 이용법을 물어보며 엄마가 ‘귀찮지? 미안해.’라고 하자 ‘엄마는 나 똥 닦는 법도 알려줬는데 뭐가 미안해?’라고 답했다는 어느 딸의 글을 봤다. 그래, 나는 말하는 법, 양말 신는 법, 양치하는 법, 걷는 법, 뛰는 법, 목욕하는 법까지 전부 엄마한테 배웠다. 그랬으면서 엄마에게 스마트폰 사용법을 가르쳐주는 건 귀찮은 것이다.
내가 먹어보니 맛있어서 요새 ‘핫’하다는 인절미와 샤인머스켓을 엄마에게 보내준 적이 있다. 사람들이 줄지어 사 간다고 하고 내가 먹어보니 맛있었는데 엄마는 “뭐 이딴 걸 몇 만 원이나 주고 사서 보내냐.”며 이런 거 보내지 말라고 화를 냈다. 돈도 없는 딸이 쓸데없이 돈 쓰는 게 싫어서이기도 하겠지만, 엄마는 정말 그게 맛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게 왜 맛이 없어. 엄마 입맛 이상하네. 다시 먹어봐.”라고 대꾸했다. 그리고 또 ‘오늘 가게 일찍 닫고 쉬어라. 밤늦게 먹지 말아라. 배 나오면 무릎 관절에 안 좋다.’ 등등 잔소리를 이어나갔고, 엄마는 내 잔소리에 짜증을 내며 전화를 끊었다. “아휴 시끄러. 니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러냐? 너나 잘하고 살아!”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인데. 내가 10대 시절 엄마에게 맨날 했던 말이다. 엄마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래? 엄마는 늙고 나도 늙는다. 내가 좋은 것을 엄마에게 강요하며 엄마가 제발 자기 삶을 아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다 엄마 잘되라고, 엄마 건강하라고 그러는 건데, 내 맘을 몰라준다. 아, 엄마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글/ 김송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