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들어 재밌게 본 영화와 드라마에는 유난히 사이좋은 친구들의 모습이 많이 등장했다. 로코코풍의 공주 의상을 고집하는 모모코와 터프한 폭주족 ‘양키’ 스타일의 이치고가 친구가 되는 영화 <불량공주 모모코>, 군인 엄마의 파견으로 하루아침에 이탈리아에 떨어진 뉴요커 소년 프레이저가 남몰래 남장을 하는 이웃집 소녀 케이틀린과 친구가 되는 드라마 <위 아 후 위 아>는 모두 주인공들이 티격태격하다가 끝내 아름다운 우정을 나누게 되는 이야기였다.
이런 이야기에 마음이 간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내가 친구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친구가 없는 건 아니다. 언제 전화해도 반갑게 전화를 받아줄 친구가 두어 명 있고, 분기에 한 번씩 만나 술잔을 기울여주는 친구도, 무엇보다 언제든 노크해도 방 문을 열어주는 동거인도 있다. 그럼에도 요즘 특히 친구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순간이 잦다. ‘왜지?’ 생각을 파고들어가니 ‘비혼러’로서 당연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니까, 가족 대신 인생을 함께할 친구들이 필요하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으니까 말이다. 결혼해서 제 가족을 꾸리는 친구들이 늘어나니까, 내게도 안정감과 소속감을 줄 존재들이 가까이 포진해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그럼 아무나 친구로 웰컴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안 맞는 사람에 맞추려다 조각조각 갈려나간 적이 많기에 이젠 조금 까다로워지기로 했다. 바라는 친구의 기준은 다음과 같다.
1. 언제든 연락하기 편하고 한 시간 이내 거리에 살아서 자주 일상을 나눈다.
2. 살아가는 가치관과 지향점이 비슷하다.(ex. 있는 사람보다 없는 사람의 편을 든다. 생애 주기에 대한 고정관념이 없다.)
3. 식성이 많이 다르지 않다.(메뉴 선정이 어렵지 않다.)
4. 그리고 불안한 삶의 안전망이 될 수 있는 이런 친구들의 더미가 있었으면 하고 바란다.
‘뭐지, 소개팅도 아니고.’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오래가는 친구에겐 연인 못지않게 특별한 무언가가 있는 법이다. 물론 이 모든 요건에 들어맞는 사람이 뿅 나타난다 해도 인간관계에는 참으로 애매모호한 개념인 ‘케미’라는 것이 작용하기에 모두 친구가 되기는 어렵겠지만.
내게 필요한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지 밑그림이 그려졌으니 2D 말고 3D 실물의 인간을 찾아야 했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고, 직접 우물을 파기도 했고 나보다 우물을 잘 팔 사람을 찾아다녔던 적도 많아서 자신 있었다. 열 명을 만나면 적어도 한 명씩은 건져왔었으니까 하다 보면 되겠지, 하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모임을 찾아 나섰는데, ‘코로나 시국’ 탓에 자리가 마련되기도 쉽지 않은 듯했다. ‘코시국’ 이전인 2019년에만 해도 가보고 싶은 모임과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게 어렵지 않았고, 특히 뒤풀이를 매개로 친해질 때 드는 시간을 앞당길 수 있었건만. 세상이 변했고 뒤풀이는커녕 모임 자체도 화상미팅이나 채팅으로 이뤄지기 일쑤라 새삼 ‘거리두기’라는 명칭이 시큰하게 느껴졌다.
반복해 죽을 쑤다 보니 더이상 친구 만들기는 불가능한 시대가 된 걸까, 아니면 내게만 어려운 걸까, 회의감과 자괴감이 마구 뒤섞여 ‘이렇게 나 혼자…’ 하고 드라마퀸의 감정선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나의 고군분투가 짠해서 하늘이 도왔는지, 기적적으로 자리가 하나 마련됐다. 몇 년 전 하던 독서모임이 여러 이유로 폭파되고 연락이 끊겼다가 이번 차에 조심스레 안부를 물었더니 고맙게도 다들 호응해줘 만들어진 자리였다.
자신감이 쪼그라들다 못해 소멸할 지경에 이르렀던 내겐 모임을 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동아줄 같았다. 예전 같으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관계에 쉽게 힘들어하고 물려 했겠지만, 이제는 한두 번의 만남으로 진득한 친구 사이를 바라는 게 오만이란 걸 알 만큼 철이 (조금) 들었다. 이 모임뿐 아니라 오래 찾고, 다리를 만들다 보면 언젠간 바라던 관계의 테두리가 내게도 생길 거라고 믿는 수밖에. 새삼스러운 친구 만들기는 아장아장 걸음마를 뗐다. 덜 외로울 미래를 만드는 여정은 지금부터다.
글/ 양수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