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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Jun 10. 2021

사물과 사람_지팡이 세 개

임신 중에는 온통 임산부만 보인다. 첫아이를 가졌을 때, 거리에, 가게에, 전철에 임산부가 그렇게 많은지 처음 알았다. 처지가 비슷한 사람은 유독 잘 보이는 모양이다. 런던 가는 기차를 타려고 역에 갔다. 록다운은 완화되었지만 아직 불필요한 이동은 자제하는 터라 플랫폼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한 서른 명쯤 되었나? 그중에 지팡이 짚은 사람이 다섯 명이나 되었다. 우리가 지팡이를 짚으니, 비로소 그 사람들이 눈에 보였다.


솟대


토니(남편의 이름이다)에겐 지팡이가 세 개 있다. 하나는 시댁에서 가져왔다. 그 집에는 옛날 물건이 많다. 부지런한 시부모님은 살아생전에, 경매나 중고장터를 자주 찾았다. 좋은 물건이 싼 값에 나오면 나중에 제 값에 팔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사두었다. 그렇게 쌓인 것이 창고 한 가득이다. 십몇 년 전에, 엔틱 찻잔 세트나 도자기를 이베이 중고장터에서 팔아드린 적이 있다. 그런데 깨지는 물건이라 포장과 배송이 어려웠고 까다로운 구매자를 만나면 그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지쳐서 1년 만에 장사를 접었다. 옛것이 많이 남아 있는 영국에서 빈티지 물건을 팔아 수익을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두 분이 오랫동안 다람쥐가 도토리 모으듯 쌓아놓은 물건들은 세상 떠나신 후에도 그대로 남았다. 지팡이도 그런 도토리 중 하나였다. 20년쯤 창고에 잠자고 있다가, 시아버지가 말년에 잠깐 사용하셨다. 이제 남편 것이 되었다. 


오래된 물건임에 틀림없다. 누군가가 잡고 지탱했을 손잡이는 반질반질하게 윤이 나는 게, 어릴 때 본 적 있는 외할아버지의 호두알 같았다. 오직 사람 손길이 만들어낼 수 있는 마모가 있다. 주인과 긴 세월 같이 걸었나 보다. 지팡이 끝에 달린 딱딱한 고무는 낡은 구두 뒤축처럼 사선으로 닳아 있었다. 날렵하고 가벼운 긴 몸통과 새의 머리처럼 보이는 손잡이 때문인지, 처음 이 지팡이를 봤을 때 나는 ‘솟대’가 생각했다. 부드럽고 우아해서 마음에 든다. 언젠가 내가 지팡이를 짚을 날이 오면, 이걸 쓸 거다.     


대나무


마을에 있는 골동품상에서 2파운드(약 3천 원)를 주고 샀다고 했다. 비슷한 간격을 두고 대나무 마디가 불거져 있었는데, 등 긴 동물의 척추가 생각났다. 용각류 공룡의 목뼈가 이런 모습이었을까? 

토니는 호신술에 관심이 많다. 한때 이스라엘 특공무술 ‘크라브마가’를 했다. 지금도 호신술동호회에 나간다. 건강이 나빠져서 혈압이 널을 뛰고 호흡도 가쁜데, 그래도 동호회는 빠지지 않는다. 컴퓨터 검색 기록을 보면, 그는 하루 종일 이 생각만 하는 것 같다. 대나무 지팡이도 호신용 무기로 구입했음에 틀림없다. “이 지팡이는 가볍고 단단해서 여러모로 쓸모가 있어. 앞뒤로 뾰족한 이 손잡이 끝을 봐, 이걸로는 파워풀한 공격을 할 수 있어. 싸울 상황이 되었을 때 아주 유용하지.” 

그의 말을 들으며 영화 <킹스맨>에서 콜린 퍼스가 우산으로 동네 양아치들을 혼내주는 장면 같은 것이 떠올랐다. 그의 머릿속에서 그는 아직도 킹스맨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웃어주었다. 나중에 그가 지팡이 없이 밖을 나설 수 없는 순간이 오더라도, 손잡이 끝의 이 뾰족한 촉감은 그를 설레게 할 거다. 이 대나무 지팡이는 그의 몸뿐만 아니라 정신도 지탱해줄 것이다. 


사과


마틴은 펍에서 자주 만나는 술친구이다. 젊었을 때는 시추선에서 근무하는 간호사였다. 은퇴한 지금은 소일 삼아 고장 난 물건을 수리해주고 저녁에 펍에서 동네 사람들과 술을 마시면서 지낸다. 그래도 전직 간호사인지라, 같이 있는 사람의 몸의 이상을 금방 알아챈다. 그의 전화를 받고, 그길로 토니를 데리고 응급실에 간 날도 있었다. 병원에서 퇴원하고 어느 날 토니는 마틴을 만나 그간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아픈 사람의 하소연이 길어졌나 보다. 하필이면 마틴은 그날 다른 일로 짜증이 나 있었고 이미 술도 여러 잔 마셨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죽어.” 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말이었다. 그 뒤에 생략된 말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 이제 그만 해. 너만 힘든 게 아니야.) 토니는 마음이 상했다. 그 후 그를 만나지 않았다. 

며칠 전에 마틴이 문자를 보냈다. “한동안 못 봤네. 무슨 일이 있어? 우리 집에 놀러 올래?” 마틴 집에 갔던 토니가 못 보던 물건을 하나 가지고 돌아왔다. 자초지종은 이렇다. 마틴은 지난번에 있었던 일을 기억조차 못했다. 토니가 그 일을 상기시키자 그는 사과했다. 그래도 계속 미안했던 모양이다. 토니가 짚고 온 대나무 지팡이를 보더니, 방에 들어가 지팡이 하나를 들고 나왔다. 말 머리 모양의 금속 손잡이에 몸통이 삼단으로 분해되는 엔틱이었다. “이건 우리 할아버지가 쓰던 거야. 할아버지는 1차대전에 참전했으니 오래된 물건이지. 맘에 들면 가져.” 사과의 징표였나 보다. 

“맘에 들어?” 나의 물음에 토니는 이렇게 말했다. “응, 아주 멋져. 어떤 엔틱 지팡이는 손잡이 아래쪽에 뭘 감출 수 있는 비밀 공간이 있어. 어떤 건 칼을 숨길 수도 있는데, 이건 이 안에 술을 담을 수 있는 병이 있어. 근사하지… 그래도 다시 돌려줄 거야. 할아버지의 유품을 이렇게 받을 수는 없지. 마틴은 이미 사과했어. 이제 괜찮아.”     


광고


런던에 가면서 말 머리 지팡이를 들고 나간 것은, 돌려주기 전에 한 번 써보고 싶어서였다. 로열런던병원은 화이트채플 역에 있었다. 19세기 말 ‘잭 더 리퍼’가 활개 치던 곳이다. 진료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모퉁이에 있는 펍에서 점심을 먹었다. “셜록 홈즈도 지팡이로 싸운 적이 있잖아?” 토니가 불쑥 말했다. 자나 깨나 그 생각이다. 그에게 지팡이가 낭만적인 물건이라서 다행이다.

지팡이를 짚고 걸으니 사람들이 눈에 띄게 배려해주었다. 전철을 타니, 입구에 앉은 사람이 벌떡 일어나서 자리를 양보했다. 전철 안 광고판에 이런 문구가 있었다. “다른 이들을 재촉하지 마세요. 우리 중 어떤 이들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BE PATIENT WITH OTHERS. Some of us need more time than others.)” 분홍색 바탕에 모래시계가 그려져 있었다. 이 광고판은 도심 역 플랫폼에도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괜히 고마웠다. 물론 이런 광고가 붙어 있다는 것은, 이게 잘 안 지켜지기 때문일 거다. 그래도 이렇게 자꾸 일러주면 건강한 사람들도, 지팡이 짚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고, 그들의 속도를 헤아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나도 그전에는 잘 몰랐다. 지팡이 짚은 사람 곁에서 같이 걷기 전까지는. 


글, 사진/ 이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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