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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Oct 22. 2021

생명을 얻은 문자,
혈색이 감도는 서울

타이포잔치 2021 : 거북이와 두루미


100년 넘은 기차역에서 들리는 작지만 분명한 맥박 소리. 생명을 얻은 문자들이 창문과 바닥, 천장까지 가득 찼다. 대면과 비대면의 어정쩡한 틈에서 걸어 나와 그 생명력에 뺨을 대본다. 간만에 온기가 느껴졌다.


곳곳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해프닝은 도시에 새로운 표정을 입힌다. 2019년 이후 우리의 삶은 확실히 전과 달라졌지만, 영감의 순간은 폐허 속에서도 존재하는 것. 문화 행사들이 여전히 멈춰 있거나 비대면으로 운영되는 가운데 세계 유일의 국제 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인 2021 타이포잔치가 구서울역사 문화역284에서 개막했다. 제1회 타이포잔치가 2001년의 일이니 어느새 20년이 흘렀다(물론 중간에 긴 공백기가 있었지만). 20년 넘게 이어져오던 유럽의 타이포그래피 행사 Typo Berlin도 재정적인 이유로 2019년 중단된 걸 생각하면 국제적인 타이포그래피 행사를 지금껏 유지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터.





2017년 ‘문자와 몸’, 2019년 ‘문자와 사물’에 이어 올해는 ‘문자와 생명’이라는 주제를 풀어낸다. 팬데믹 시대에 ‘생명’이라니. 알파벳 중심의 타이포그래피에 ‘동양적’ 세계관을 담고자 했던 이재민 총감독은 생명 안에서 순환이라는 키워드를 추출해 전체적인 전시의 맥락과 동선을 짰다.



타이포그래피로 나누는 상징과 은유의 대화


프랑스, 브라질, 스웨덴을 비롯해 국내외 총 54팀이 참여한 이번 전시는 압축미가 느껴진다. 2019 타이포잔치에 비해 작품 수는 적지만, 아기자기하고 촘촘하게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


전시는 ‘기원과 기복’, ‘기록과 선언’, ‘계시와 상상’, ‘존재와 지속’ 등, 총 네 가지 부문으로 나뉜다. 각 작품의 공통된 특징은 문자의 영역을 글자에만 국한하지 않았다는 것. 생각해보면 이미 우리의 일상 또한 그러하다. 다양한 이모지가 단어 역할을 하고, 분절된 자음들이 의성어와 의태어를 대신하니 말이다. 기호를 비롯해 각종 시각언어로 재정의된 문자는 디자인뿐만 아니라 일러스트레이션, 현대미술, 공예, 사진 등 시각예술 전 분야의 뮤즈가 되어 새로운 화법을 만들어낸다.



ⓒ이화영, 〈나무 아래 쥐부터 구름 아래 돼지까지〉, 120×220cm, 디지털프린팅, 2021




신선한 관점으로 기록하기


조형적 아름다움이 인상적인 1층의 ‘기원과 기복’ 파트를 지나면 ‘기록과 선언’ 파트가 나온다. 내가 관람한 두 번 다 관객들이 가장 많았고, 또 가장 오래 머무는 파트였다.


첫 번째 챕터 ‘말하는 그림’은 글 쓰는 작가와 일러스트레이터가 협업해 완성한 작품이다. 다만 협업의 순서가 일반적인 방식과는 조금 다른데, 글 보조적 장치로서 그림을 그린 게 아니라 먼저 그려진 그림을 보고 글을 자유롭게 연상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고. 단행본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의 저자이기도 한 황선우, 김하나 작가가 그림에 글을 보태는 역할을 했다.


ⓒ펜 유니온 (김하나, 황선우), <먼 곳에 기둥 박기>




여섯 명의 일러스트레이터가 그린 그림은 두 작가의 관찰과 상상력을 거쳐 인권, 젠더 이슈, 뉴 노멀, 부동산 문제 등 다양한 화두로 재해석된다. 글과 그림이 각각 다른 프레임에 있어 두 작가처럼, 글을 읽기 전 일러스트만 보며 각자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상을 언어화해보는 즐거움도 있다.


바닷가의 플라스틱 쓰레기를 수집하고, 기록하며 환경문제에 접근하는 ‘흔적들’도 기억할 만하다. 오랜 시간 바닷속을 유랑하며 깎이고 무뎌진 플라스틱 쓰레기에 ‘뉴 락 표본’이라 이름 붙인 것이 흥미롭다. 경각심이나 고발의 메시지를 배제한 채 플라스틱 쓰레기를 미적 연구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접근이 오히려 신선했다.



ⓒ장한나, 〈뉴모픽락 2020〉, 33.4cm×45.5cm, 나무패널과 수집된 플라스틱, 2020




마지막 챕터는 2015년 이후 발간된 한국 도서들 가운데 북 디자인의 지형 변화에 영향을 미친 사례를 모은 ‘생명 도서관’이다. 당대의 타이포그래피를 만끽할 수 있는 곳. 예뻐서 사놓고는 방치한 내 책장 속 책들과 여러 개가 겹쳤다.



생명도서관 설치 예상도

2층으로 올라가면 ‘게시와 상상’ 파트가 펼쳐진다. 거대한 설치작품과 VR 체험, 미디어 아트로 마치 현대미술의 한 씬을 옮겨놓은 듯한 곳이다. 마지막 ‘존재와 지속’ 파트까지 보고 나면 다시 처음 전시가 시작했던 곳으로 되돌아온다. 전시장의 동선까지 수미상관의 구조로 배치해 생명과 순환을 표현한 것. 운영진의 일관된 의도가 촘촘히 쌓여 있는 전시다.



이야기에 이야기를 쌓는 타이포잔치


문자를 매개로 흥미로운 담론을 만들어온 행사지만 그간 타이포잔치는 현대미술의 난해함과 현학적인 텍스트에서 오는 부담감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 이번 2021 타이포잔치는 일반인(타이포그래피 디자인을 따로 공부하지 않은)도 쉽게 즐길 수 있는 작품들이 많다는 평이다. 물론 타이포그래피의 범주를 어디까지 확장해서 볼 것인가에 관해서는 보는 이마다 생각이 다를 듯하다. 하지만 전시에서 다루지 못한 이야기들을 진솔하게 나누는 ‘온라인 토크’, 친절하고 선명한 텍스트들이 올라오는 공식 블로그 등을 통해 이번 타이포잔치의 발신자는 수신자에게 끊임없이 대화를 건넨다. 이 과정에서 전시는 소화하기 좋은 말랑말랑한 상태로 변하고, 이름처럼 누구나 와서 즐기고 놀 수 있는 잔치가 되는 것이다.



ⓒ이미주,〈여래신장〉_엘모,〈삶사랑〉 설치 예상도


글자만이 유일한 재료라고 생각하는 타이포그래피의 시대는 지났다. 인식을 기호화할 때 이미 문자만을 그 대상으로 삼지 않기 때문이다. 맥박 소리가 들리는 100년 넘은 기차역, 전시장을 빠져나오며 생각한다. 생명을 품은 문자들이 생성되고 소멸하는 과정에서 나는 무엇을 남기고 싶은가. 무엇을 발신하고 어떻게 수신할 것인가. 잿빛이었던 도시에 서서히 혈색이 감돈다.




글. 김선미 | 사진.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전문은 빅이슈 261호에서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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