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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Nov 22. 2021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살게 되기까지

"유경 씨, 그건 아동학대예요"


열다섯 살 때, 1년 정도 받던 상담에서 상담사는 내게 말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엄마는 날 때렸다. 속옷 차림으로 내쫓겨 겨울날 현관문 앞에서 떨며 나를 들여보내줄 아빠가 퇴근하기를 기다린 적도, 방문이 닫히고 엄마가 매를 들면 방 구석구석을 돌며 얻어맞았던 기억도 많다. 아빠는 가끔은 막았지만, 대체로 방관했다. 내가 맞을 때면 동생을 데리고 그 방을 나갔다. 그에게는 엄마의 폭력으로부터 문을 닫고 TV를 볼 수 있는 권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말짱히 살아 있었고, 맞거나 내쫓길 때가 아니라면 평소엔 대화도 하고 함께 밥도 먹었다. 가끔은 사이도 좋았다. ‘아동학대’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아동학대라면 뉴스에 나오는, 부모의 학대와 무관심에 끝내 아이가 굶어 죽은 사건에나 어울리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쩐지 상담사의 그 말을 듣자마자 그간의 내 생활이 왜인지 억울해졌다. 어쩐지 내가 불쌍하고, 슬펐다. 어쩌면 나는 내가 학대의 당사자라는 걸 인정하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부모와의 진짜 갈등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그동안의 폭력에 대해 문제 제기하기 시작했고, 엄마는 그에 대해 사과했다. 하지만 나는 이후에도 엄마와 싸울 때면 어김없이 엄마의 폭력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동학대’라는 명명 이후 내 인생에서 많은 것이 그 유년 시절의 폭력 때문에 꼬이고, 사라지고, 뒤틀렸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내 친구들은 부모의 그림자 없이, 후유증 없이 지낼 수 있는데 나는 엄마를 마주할 때마다 내 깊은 구석에서 어떤 큰 그림자가 어김없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자 엄마는 곧 왜 자신을 용서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자신이 사과했지 않느냐고, 너는 왜 그렇게 피해 의식에 찌들어 사냐고, 언제까지 그 얘기를 할 거냐고.




집을 더 이상 집이라고 부르지 않기로 했다

Unsplash


그리고 나는 작년 여름, 집을 나왔다. 정확히는 20여 년을 살았던 원가정을 떠나 탈가정을 했다. 그 모든 용서와 사과와 폭력의 역사 끝에 엄마는 다시 날 때렸고, 아빠는 언제나처럼 방관했다. 나는 더 이상 그 폭력을 용납하거나 속으로 삭힐 수 없었다. 아니, 그러지 않기로 했다. 나는 집을 나왔고, 고마운 친구들이 내어주는 거처를 전전하며 그해 여름을 보냈다.


사실 신체적 폭력을 제외하면 우리 집은 내 복장을 단속하거나, 엄격한 통금 시간을 두거나, 시도 때도 없이 연락해 어디냐고 묻는 등의 소위 ‘보수적이고 답답한 곳’은 아니었다. 오히려 외박을 알리지 않아도, 자정이 꼬박 넘어 귀가해도 별 잔소리는 없었다. 내가 활동하는 단체에서 청소년들과 가정과 부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면, 되려 나는 아주 자유로운 편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친구와 늦게까지 바깥에서 시간을 보낼 때면 어김없이 그에게 쏟아지는 전화와 문자를 보며, 오히려 내 부모는 나에게 관심이 없나 싶어 섭섭할 정도였다. 내 부모는 내가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것도, 대학에 가지 않는 것도 용인하고 이해하는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딸바보’라고 불렀고, 딸의 최종 학력이 초등학교 졸업인 것에도 괘념치 않는 ‘진보적 부모’라고 불렀다.


하지만 내가 내 귀가 시간이나 복장에 간섭하지 않는, 내 정체성에 말을 보태지 않는, 대학에 가라고 부르짖지 않는 원가정을 ‘안전한’ 공간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물론 내가 집을 나오게 된 결정적 계기는 신체적 폭력이었지만, 나는 집에 살며 가슴이 떨리지 않던 순간이 없었다. 부모는 대놓고 간섭하고 침범하는 언행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나를 통제하고 폭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청소년기 내내 여성 친권자는 내가 먹은 것을 제대로 치우지 않거나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하면 내 방까지 들리도록 혼잣말마냥 욕설을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렇게 위협적인 그가 언제든 맘만 먹으면 내 방에 들어올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내 방은 내 것이었지만, 언제든 침범당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내 것이 아니었다. 남성 친권자의 무기는 자신의 돈과 가부장이었다. 그는 나에게 대학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지만, 대학 학비 외의 경제적 지원은 해줄 수 없다고 했다. 본인이 성질이 나거나 내 언행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가 살라’고 말했다. 평소엔 주변인들로부터 ‘딸바보’ 소리를 들으면서, 결국 자신의 심사가 뒤틀릴 때에는 언제든 나를 이 집 밖으로 내쫓고 모든 지원을 끊겠다고 협박했다.


모든 것이 부모의 ‘마음’이나 ‘기분’대로 결정되거나, 행사될 때 나는 무력했다. 내 사회적, 경제적, 시공간적 권리는 모두 부모와 가정에 종속되어 있었다. 부모가 나에게 “그렇게 싫으면 네 마음대로 알아서 살아.”라고 말할 때 나는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이 사회에서, 아니 이 집에서조차 내 “마음대로, 알아서” 할 수 있는 건 실질적으로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청소년의 삶이 스스로 설 수 있다는 상상

Unsplash

그리고 나는 청소년 페미니즘 단체에서 일하고, 여성 청소년들과 만나며 이것이 ‘우리 집만의 문제나 불화’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정도와 상황은 모두 달랐을지언정, 가정에서 여성 청소년들은 대부분 비슷한 불안감과 위협에 시달렸다. 부모의 카드를 받아 쓰지만 그 카드는 그들이 무엇에 돈을 썼는지 어디를 갔는지 감시하는 수단이 되었고, 내 청소년 동료는 ‘페미니즘 활동’을 하는 걸 부모가 알게 되어 활동을 중지해야만 했다. 내가 태어나고 이때까지 자란 것은 너무 쉽게 부모에게 진 빚이 되었고, 내 여성인 친구는 그의 남성 형제에게는 요구되지 않는 ‘이때까지 키워줬으니 부모에게 이 정도는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정서적 돌봄에 대한 압박에 시달렸다. 청소년의 모든 사회, 경제적 권리가 부재할 때 모성애 혹은 부성애로 불리는 친권자의 지원과 사랑은 너무 쉽게 통제와 협박, 폭력의 수단이 되었다.


나는 시민단체에서 일하고, 집을 나오고, 1인 가구인 어린 여성으로 살아가며 이 사회 자체가 애초에 가족 바깥의 개인을, 특히 어리고 힘없는 사람들을 내치는 방식으로 설계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020년 5월, 정부에서 지급한 긴급재난지원금은 가구별로 수령하는 방식이었고, 이후의 지원금 역시 청소년은 세대주가 대리 수령하는 방식이었다. 애초에 가족이나 집 바깥의 청소년은 고려되지 않고, 청소년들에게도 각자의 ‘몫’이 있다는 상상 자체가 부재한 채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설계였을 테다. 꼭 원가정 바깥의 청소년들만이 아니더라도, 재난지원금의 가구별 지원은 결국 청소년들의 ‘부채감’만 증가시키는 방식이다. 이미 부모로부터 생계 지원을 받고 있는 대부분의 청소년이 “모두가 살기 어렵다고” 여겨지는 재난 상황에서 ‘지원금’ 명목으로 나온 돈을 제 몫으로 요구하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꼭 지금 청소년이 아니더라도, 필요한 돈을 요구하기 전 부모의 앞에서 쭈뼛거려본 경험은 누구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이제 혼자 산다. 물론 나는 여전히 친권자들로부터 집의 월세를 지원받고, 때때로는 추가적인 지원도 받는다. 내가 사는 곳은 정확히는 집이 아니라 방이고, 언제까지 방에 살아야 할지도 알 수 없다. 나는 작년에 집을 나왔지만 올해 여름엔 벌써 두 번째 집으로 이사했고, 마찬가지로 언제까지 이렇게 옮겨 다니며 살아야 할지도 알 수 없다. 여전히 ‘내 집’이 없는 미래는 막막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당장 내가 안전하고 존엄할 수 있는 공간은 중요하다. 스스로 서보는 일이 ‘공간 마련’만으로 달성되지는 않겠지만, ‘공간’ 없이 자립의 가능성에 대해 고민하거나 경험해보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내 공간에선 설거지를 쌓아두어도, 샤워 후 머리카락이 욕실 바닥에 남아 있어도 소리 지를 사람이 없다. 언제나 내 마음만 선다면 친구를 데려와도, 노래를 맘껏 크게 틀어도 상관이 없다. 무엇보다 내 공간에선 조마조마하지 않고, 언제 누가 들어올까 불안해할 일이 없다. 작년부터는 과거의 나처럼 오갈 곳 없는 아기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살고 있다. 내가 처음으로 선택한 가족이고, 내가 책임져보는 존재들이다.


일단 당장은, 난 내 여덟 평짜리 방에서 나 자신이 존엄하고 자유로운 존재라고 느끼는 것 같다.




글. 최유경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 활동가.


이 글은 빅이슈 263호에서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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