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빅이슈코리아 Jan 26. 2022

적게 먹더라도 좋은 술을 마시겠다는 다짐

해가 바뀌면 으레 하는 기도가 있다. 오, 신이시여. 이번 해는 작년보다 많은 술을 맛보게 하시고, 주량은 조금 더 늘려주소서. 제 간을 긍휼이 돌보아주시고, 숙취와 흑역사는 저를 떠나게 하소서. 바라옵기는 소주 따위에 취하지 않는 정신력을 주시고 차라리 양주 같은 ‘고오급’ 술에 잔뜩 절여지게 하소서– 아멘.

새해를 맞이하면 나를 돌아봄과 동시에 비싸고 맛있는 술을 잔뜩 맛보겠다는 다짐을 한다. 이런 다짐을 하지만 놀랍게도 술꾼은 아니다(새해도 술과 함께 맞이하긴 했다). 그러나, 어느 날 세상에 술이 사라지기라도 한다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숨어 있는 히든 바를 찾아다닐 정도의 애정은 가지고 있달까.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말을 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알코올 중독자 아냐?’라는 의심을 피하고 싶을 뿐이다. 애주가라는 좋은 표현이 있으므로 편견과 걱정 어린 시선은 잠시 거둬보자.


 바라보는  눈길은 그윽하기만

새해부터 술이나 마시겠다 다짐하는 나 같은 사람이 가장 애정하는 공간은 어디 일까. 단번에 술집!이라고 외칠 수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이 페이지는 ‘인생은 먹고 사고 쓰는 것이므로’라는 애정이 잔뜩 깃든 나의 물건을 소개하는 곳이다. 그렇다면 술과 관련된 것 중 가장 애정 어린 것은 무엇일까. 술이 잔뜩 있는 술장!이라고 외칠 수 있겠으나 술장보다 더 귀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술잔 장 되시겠다. 왜 술잔 장이냐고? 술장은 곧 비워질 술을 떠안고 있는 곳이라 언제나 슬픔이 묻어 있고, 술잔 장은 늘 채워질 술을 기대하고 있으니 애정이 갈 수밖에. 게다가 술잔 장은 나의 엄격한 기준을 통과했거든.

지금의 술잔 장은 내가 세운 기준을 완벽하게 통과했다. 장의 길이는 자유롭되 폭은 25cm에서 27cm 사이일 것. 와인 잔의 경우 지름이 넓은데, 가장 넓은 지름을 가진 와인 잔은 11cm에 임박한다. 짚신도 짝이 있는 것처럼 술잔도 짝이 있으니 앞뒤로 나란히 둘 때 잔이 튀어 나오거나 공간이 좁아 보이지 않아야 한다. 그렇다고 폭이 너무 넓을 경우는 세 잔이고, 네 잔이고 앞뒤로 끼워 넣고 싶은 마음을 주체하지 못할까 봐 제한을 뒀다. 높이는 최소 30cm 이상일 것. 맥주 잔 중 가장 긴 잔의 경우 25cm이고, 와인 잔의 경우 27cm까지도 있다. 잔을 접거나 구겨 사용할 수 있다면 모를까. 긴장하지 않고 잘 꺼내 쓰려면 최소한 30cm 이상의 높이는 보장되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조금의 양보도 하지 않고 열흘을 꼬박 찾아 장을 구매했다.

이토록 철저한 기준을 내세워 마련한 장의 만족도는 하늘을 찌른다. 특히 마음껏 술을 마실 수 없는 어떤 날엔 더욱 그렇다. 술을 마시고 싶지만 중요한 일정이나 이유로 마시지 못하는 날, 그런 날엔 술잔 장을 그윽이 쳐다본다. 꿀렁꿀렁 소리를 내며 잔을 채워가는 술잔이 절로 상상된다.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고 취기가 오르는 기분이랄까. 그렇게 한껏 견딘 인내심은 이윽고 고삐가 풀린 날, 두 배로 더 즐겁고 반가운 마음으로 술을 대하게 한다. 이런 게 바로 애주가의 면모가 아닐까. 언젠가는 모든 술을 담을 수 있도록 모든 술의 잔을 찾아 준비해놓으리라는 생각도 해본다. 아, 혹시 새해를 맞이해 금주를 결심한 독자가 있다면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남긴다. 그리고 위로의 한 말씀을 남겨본다. 지나친 음주는 몸에 해롭지만 적당한 음주는 삶에 활기를 불어넣어주니 금주에 실패하더라도 부디 좋은 술로 실패하시라는 심심한 위로의 말을 말이다. 


글/사진. 김유진

매거진의 이전글 평소보다 느리고 보통 날보다 심심하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