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가에게 빠지면 답이 없는 이유
방탄소년단의 래퍼 슈가(SUGA)는 큰 목소리로 말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본능적으로 사람을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슈가는 이상하다. 경북 대구 태생인 그는 ‘오다 주웠다’의 의인화 같은 경상도 남자처럼 보이지만, 리얼리티 예능 프로에서 바비큐 파티를 할 때마다 늘 도맡아서 고기 집게를 잡고, 주방장처럼 능숙하게 음식을 만들어 동생들을 먹인다. ‘TV 나와 하는 돈 자랑들은 이젠 그냥 귀엽지’(‘All Night’) ‘남산동 지하에서 이제는 펜트하우스’(‘저 달’)라고 랩을 하며 성공을 플렉스 하지만, 10대 시절부터 스스로 돈을 벌어 차비로 쓰고, 미디 장비도 사며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깨달은 사람만의 차분한 현실감각이 있다.
슈가는 정말 이상하다. 방탄소년단의 슈가부터 두 번의 믹스테이프를 발표한 솔로 래퍼 Agust D, 아이유의 ‘에잇’ 등 히트곡을 작곡한 프로듀서 ‘By SUGA’까지 무려 세 개의 이름으로 음악을 발표하고 모두 성공을 거뒀지만, 그의 에고는 담백하다. 말수도 적다. 대화할 땐 말하기보다 듣는다. 그러나 소신이 뚜렷한 사람답게 달변가이며, 초연한 사람들이 그러하듯 세상의 모든 것을 유머로 만드는 능력이 있다. 이런 예측할 수 없는 모습 때문에 사람들은 슈가에게 긴장하고 기대한다. 그가 큰 목소리로 말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다.
진짜 반전은, 그가 천부적인 아이돌이라는 사실이다. 내 아이돌은 마흔이 되고 예순이 되어도 팬들에게 귀여운 고양이·토끼·강아지·병아리지만, 그는 정말 고양이 같다. 불러도 오지 않는 고양이처럼 쉽지 않은 사람이지만, 나를 울컥하게 하는 온기가 있는 존재다.
슈가는 작곡가와 래퍼로 오디션을 보고, 제2의 원타임(1TYM)을 목표로 연습생 생활을 시작해 ‘어쩌다 아이돌’이 되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아이돌에 진심이다. “영원히 방탄소년단을 하겠다.”라며 자부심을 갖고 일하고, 국가 경쟁력을 드높인 케이팝 산업의 주역이지만 멸시받아온 아이돌 팬들에게 존경의 마음을 꾸준히 표현한다. 자신의 건강 문제로 일본 고베에서 열릴 예정이던 콘서트가 연기되자 기대한 팬들에게 상처를 줬다고 자책하며 휴가 때 그곳을 찾아가기도 했다. 모든 것에 심드렁해 보이는 차가운 인상이지만, 그의 환한 웃음은 수도관이 동파해 집주인과 긴 통화를 마친 암담한 겨울밤에도 마음을 석촌호수 벚꽃길로 만든다.
슈가가 천부적 아이돌인 이유는 마이크를 잡는 것만으로 사람의 마음을 들끓게 하기 때문이다. 거대한 스타디움 콘서트홀을 압도하는 격정적인 래핑을 하다가 갑자기 마이크를 객석으로 돌려도 청중이 곧장 다음 벌스를 이어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몰입하게 만든다. ‘성공에 눈먼 신인 아이돌’만 ‘입어주는’ 팬 서비스 의상을 입고 상큼하게 춤추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래서 팬들은 ‘민윤기(슈가의 본명)에게 빠지면 답이 없다’며, ‘민.빠.답.’을 외친다.
Agust D
10대 때 작곡을 시작하고 힙합 크루로 활동했던 슈가는 데뷔 초 방탄소년단에서 유일하게 완급 조절이 가능한 멤버였다. 반항적이지만 절실한 눈빛으로 카메라를 쏘아보며 몸이 부서져라 춤추고 노래하던 신인 가수 방탄소년단은 인상적이긴 했지만 멋있지는 않았다. 강강강으로 몰아치는 무대에서 슈가의 여유로움은 방탄소년단을 조금 더 프로다워 보이게 했다. 그는 방탄소년단의 균형이자 모범으로 멤버들이 각자의 멋을 찾을 때까지 무대를 리드했다. 슈가는 책임질 것이 많았다. 방탄소년단의 현재 생각과 느낌을 음악으로 만드는 방식이 고유화되며 프로듀서로서 그의 역할도 점점 커졌다. 당시 그는 음반을 내도 방송 출연이 불투명한 암담한 현실에서 하루 종일 작업실에 틀어박혀 곡을 쓰고 일곱 명의 멤버가 함께 쓰는 좁은 침실로 돌아와 ‘내일은 다를 거라는 믿음’을 안고 잠을 청했다. 이 위태롭고 찬란한 청춘의 이야기를 담은 곡 ‘Tomorrow’(2014)는 방탄소년단이라는 이름을 대중에게 처음 각인한 <화양연화> 앨범(2015) 시리즈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2016년에는 방탄소년단에게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첫째는 멤버들이 모두 압도적으로 멋있어진 것이고, 둘째는 슈가의 첫 솔로 믹스테이프 <Agust D>가 발표된 것이다. 2016년은 방탄소년단의 커리어가 기념비적으로 성장한 해다. 2013년에 데뷔해 2015년에 음악 방송에서 처음 1위를 했는데, 2016년에는 단일 앨범 기준 그해 가장 높은 판매고를 기록했고, 연말 가요 시상식에서 ‘올해의 가수상’을 받았다. 방탄소년단은 여전히 강강강의 무대를 선보였지만, 어떻게 힘을 줘야 하는지 터득한 것처럼 보였다. 너무 열심히 해서 아마추어 같던 모습은 사라졌다. 수상 소감을 말하는 무대에서 동생들에게 늘 의젓하고 강한 형이던 슈가는 가장 많은 눈물을 흘렸다.
이제 슈가는 방탄소년단의 균형이자 모범이 아니어도 괜찮았다. 솔로 래퍼 Agust D의 이름으로 발표한 첫 번째 믹스테이프에서 그는 치우치고 불량한 자신의 내면을 폭로했다. ‘말하고 싶은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의 벽을 허물고, 인생에 단 한 번만 가능한 이면 없는 분노를 폭발하며 전무후무한 마스터피스를 완성했다. 무대에서 여유를 부리던 방탄소년단 슈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아무도 그 안에 이런 음악이 있을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의뢰자의 요구에 맞춰 상업적 성공을 목표로 작곡한다는 프로듀서 By SUGA의 정체성은 근래에 형성된 것이 아니다. 그는 처음부터 방탄소년단의 슈가가 해야 하는 음악을 스스로에게 의뢰했다.
그리고 2020년, 4년 만에 그가 두 번째 믹스테이프 <D-2>를 발표했다. 그동안 방탄소년단은 더 멋있어졌고, 슈가는 대인기피증과 우울증으로 정신과 상담을 받았던 과거를 뒤로하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며 심리 상담 공부를 시작했다. 최선의 방어로 공격을 택한 첫 번째 믹스테이프와 달리, 두 번째 믹스테이프는 불안(‘저 달’)에서 시작해 후회(‘어땠을까’)로 끝난다. ‘사람들은 변하지 나도 변했듯이 세상살이 영원한 건 없어 다 지나가는 해프닝’(‘사람’)이라며 흔들리며 사는 인생을 관조한다. 첫 번째 믹스테이프 <Agust D>는 독백이었지만, <D-2>에서 그는 세상에 말을 건다. 슈가와 Agust D의 경계가 다소 흐릿해지고, 민윤기라는 한 사람의 창작자가 더 선명해진 것도 보인다. 메인곡인 ‘대취타’는 방탄소년단의 음반에 담아도 무리가 없고, 방탄소년단의 음반에 실은 슈가의 솔로곡 ‘Interlude: Shadow’는 Agust D의 믹스테이프에 실어도 무리가 없을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방탄소년단의 슈가, Agust D, 프로듀서 ‘By SUGA’ 세 개의 이름으로 음악을 발표한다. 크레디트나 형식의 차이일 뿐 모두 민윤기의 음악이다.
슈가는 꿈을 모두 이뤘다고 말했다. 운이 좋았던 게 아니라, 인디언의 기우제처럼 그가 이룰 때까지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슈가는 올해 서른 살이 되었다. 쉬지 않고 달려온 찬란하고 치열했던 그의 20대에게 수고했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기도하고 싶다. 당신의 내일에 평범한 행복이 더 많기를, 주저앉고 싶은 어느 날 누군가에게 사랑받는다는 사실이 너를 일으켜 세우기를, 일어서지 않아도 괜찮기를. 그리고 오늘 밤 편히 잠들기를.
글/ 최이삭(케이팝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