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은 웃고, 어느 날은 우울하다
영화 <중경삼림>에는 “오늘은 파인애플 통조림을 좋아했던 사람이 내일은 다른 걸 좋아하게 될지도 모른다.”라는 대사가 나와요. 그리고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라는 영화에서 주인공 ‘엘리오’가 헤라클레이토스의 책을 읽는 장면이 나오는데,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라는 말을 남겼죠. 두 영화는 ‘사랑과 변화’를 이야기했지만, ‘집과 변화’라는 주제로도 비슷한 문장을 만들 수 있어요. “오늘은 집에서 요리해 먹는 것을 좋아했는데, 내일은 배달 음식 시켜 먹는 것을 좋아하게 될지도 모른다.”라던가, “같은 집에 두 번 살 수는 없다.”라고 말이에요. 두 문장을 곱씹으니, 주거 환경에 따라 어느 날은 웃고 어느 날은 우울해하던 유은이가 떠올라요. 밖에서는 절대로 하지 않을 이상한 행동을 집에서 한 적이 있다는 유은이의 솔직한 이야기를 들으며, 유은이가 어떤 집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어요. 오늘은 오랜 기숙사 생활 이후 언니와 함께 넓은 집에서 살다가 혼자 원룸에서 지내는 유은이의 집으로 갑니다.
자기소개를 부탁해.
안녕하세요. 식품영양학과에 재학 중인 대학생 최유은입니다. 자기소개를 재미있게 하고 싶은데, 긴장해서 잘 안 되네.(웃음)
왜 이렇게 긴장한 거야.(웃음)
누군가를 집에 초대하면 왠지 일기장을 보여주는 것처럼 은근히 긴장되더라고. 집은 내가 가장 솔직해지는 장소이기 때문이야. 밖에선 못 하는 표현이나 행동을 집에 혼자 있으면 마음껏 할 수 있잖아. 예를 들면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춘다든지, 유튜버 놀이를 한다든지, 셀피를 찍거나 혼잣말을 한다든지 하지. 슬플 땐 엉엉 울 수도 있고, 엉엉 울다가 갑자기 밥을 먹을 수도 있어. 어떤 행동을 해도 나를 이상하다고 생각할 사람이 없기 때문인지 집은 내가 가장 이상해지는 장소이기도 한 것 같아.
집을 내가 이상해지는 장소라고 표현한 게 참 좋아. 집이 편하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편안해하는 느낌이야.
솔직히 혼자 사는 것만큼 편한 게 없잖아. 하고 싶은 행동도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청소 좀 미뤄도 뭐라고 할 사람도 없으니까. 거의 매일 밤 씻은 뒤 불을 끄고 누워서 유튜브 동영상을 보거나 노래를 듣는데 그때 가장 행복해.
또 좋아하는 순간이 있다면 언제야?
미루던 청소를 끝내고 방이 쾌적해졌을 때도 아주 좋아. 며칠 만에 원상 복구되기 일쑤지만.(웃음) 사실 이 순간은 가장 싫어하는 시간이기도 해. 집이 정리가 안 돼서 어디서부터 치워야 할지 막막할 때 참 싫더라.(웃음)
공간에 비해 물건이 무척 많아서 정리하기 힘들 것 같아.
공간이 좁은데 물건은 많으니까 더 비좁은 기분이야. 특히 빨래 건조대를 펼쳐놓았을 때 친구가 놀러 오면 그야말로 발 디딜 틈이 없어. 친구가 놀러 와서 같이 밥을 먹으려고 건조대를 한쪽으로 밀어뒀다가 먹고 난 후 다시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을 때, 공간이 퍽 좁다고 느꼈어.
너는 고등학생 때부터 기숙사 생활을 했고, 스무 살 때는 재수하느라 기숙 학원에서 지냈지. 기숙사 생활을 오래 해 물건이 별로 없었잖아. 옷과 향수가 눈에 띄게 많아졌네.
맞아. 열일곱 살 때부터 스물한 살 때까지 기숙사 생활을 했기 때문에 짐이 어지간히 없었는데, 언니와 함께 살던 집에서 내 방이 생긴 뒤로 좋아하는 옷이나 물건을 하나하나 들이기 시작했어. 친구들한테 선물 받은 물건도 집에 점점 쌓이기 시작했는데, 이상하게 향수를 선물로 많이 받았어.
좋아하는 물건과 자유롭게 지내는 이 집에서 자괴감을 종종 느낀다면서?
아침에 일어나야 하는데 몸은 안 일으켜지고 시간은 정오가 다 되어갈 때 자괴감이 들어서 싫은데 자주 그런다는 게 함정이지.(웃음)
언니랑 함께 지내는 줄 알았는데, 언제 독립해 이 동네로 이사한 거야?
지난해 8월 15일 광복절부터 1인 가구로 독립했어. 함께 살던 언니가 취직해서 집을 내놓았거든. 집이 생각보다 빨리 나가서 부랴부랴 학교 앞에 방을 알아보았고, 이 집을 제일 처음 봤는데 마음에 들어서 바로 계약했어. 급하게 이사했는데, 집을 바꾸는 시기가 잘 맞아서 다행이었지.
정말 다행이다! 언니와 함께 지내던 집에서 벌레가 많이 나와서 트라우마까지 생겼었잖아. 벌레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는데, 이 집은 어때?
처음 이 집을 봤을 때 신축 건물이라 벌레가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고, 다행히 아직까지 안 나왔어. 벌레는 다 싫어하지만 그중에서도 바퀴벌레를 끔찍이 싫어해. 지난해 11월 중반에는 위생사 시험을 준비하느라 곤충위생학을 공부했는데,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그 아이(바퀴벌레)의 생활사와 생김새까지 공부해야 해서 괴로웠어. 계속 보면 익숙해질 법도 한데 볼수록 끔찍하더라. 그런데 이상하게 바퀴벌레에 관한 내용이 잘 외워져 시험에 나오기를 은근히 바랐는데 안 나왔어.(웃음) 어휴,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는 아이야!
위생사 시험을 준비할 무렵 집에 혼자 있을 때 답답하고 눈물이 나서 창문을 열어놓는 습관이 생겼다고 했었지.
누구나 가끔 어떤 이유에서든 슬플 때가 있잖아. 그럴 때 좁은 방 안에 있으면 더 답답한 것 같아. 그래서 창문을 열게 되는데, 찬 공기를 맞으면 마음이 가라앉는 기분이 들더라고. 그런데 요즘은 추워서 5초도 못 버티고 닫아야 해.(웃음)
문 열어놓고 마음껏 슬퍼하기엔 너무 춥긴 해.(웃음) 이 집에 오기 전에 언니랑 같이 살아서 지금 더 외롭고 허전하게 느끼는 걸까?
맞아. 아무래도 핏줄이라 싸울 일이 많았지만, 그래도 배달 음식 같이 시켜 먹고, 택배 언박싱 같이 하고, 옷도 서로 코디 해주는 등 좋은 점이 많았어. 언니랑 함께 보낸 시간이 종종 생각나더라고. 그리고 빨래, 청소, 설거지, 쓰레기 분리수거 같은 집안일은 둘이 살 때도 다 하던 일인데, 혼자 하려니까 괜히 더 미루게 되고 하기 싫더라. 가끔은 집에 있을 때 혼자라는 게 크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그때 조금 힘들어. 혼자서도 외로워하는 일 없이 잘 먹고 잘 살면 좋을 텐데, 혼자 산다는 건 자유로움과 외로움이 서로 줄다리기하는 일인 것 같더라고.
자유로움과 외로움이 서로 줄다리기를 한다는 말이 재밌으면서도 슬프다. 그런데 예전에는 혼자 있는 걸 좋아했잖아.
맞아. 예전에는 혼자 있어도 외로운 줄 잘 모르고 오히려 즐겼는데, 최근에는 혼자 있는 게 생각보다 버거워. 좁은 집에 혼자 있으면 괜스레 더 쓸쓸하고, 누가 놀러 왔다 가기라도 하면 더욱 허전한 마음이 들더라고.
좁은 집에서 지내면서 집이 아니라 방에서 사는 기분이 들 때가 많다고 했잖아.
좁은 원룸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빌라는 집에 있다 보면 이게 집인지 방인지 헷갈릴 때가 많아. 옆집에서 통화하는 소리가 들릴 때도 있고, 윗집에서 누군가 샤워하면 가끔 폭포 앞에 와 있는 듯한 기분도 든다니까.(웃음) 또,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현관문 밖에서 나는 소리를 잠결에 듣고 아, 여기는 내 방이고, 거실에서 언니가 뭔가를 하고 있구나 생각한 적도 있어. 잠시 뒤 현실을 깨달았을 땐 무슨 소리지 싶어 조금 무서웠지. 지금 사는 집은 벌레가 없다는 점에서 아주 만족하지만, 조금 더 넓은 집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 하게 해.
지금도 현관문 밖에서 줄곧 누군가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 밤에 혼자 있을 때 들으면 무서울 것 같아. 넓은 집 말고도 또 바라는 집의 모습이 있다면 어떤 거야?
적당히 넓고, 적당히 조용하고, 적당히 도심에 있는 집에서 살고 싶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가득 채워서 집에 가기만 해도 힐링이 되는 집으로 꾸미고 싶어.
언젠가 네가 그런 집에서 살기를 바라면서 인터뷰를 마칠게.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어떤 사람의 집에 가는 건 그 사람을 훨씬 더 깊이 알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해. 친구 집에 놀러 가면 그 친구가 좋아하는 책, 화장품, 인형, 자주 먹는 음식, 자주 입는 옷까지 모두 알 수 있잖아. 그래서 인터뷰 요청을 받았을 때,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라는 주제가 꽤 재밌다고 생각했어. 내 이야기도 다른 사람들처럼 재미있는 내용으로 채워지면 좋겠는데, 긴장해서 잘 대답했나 모르겠네.(웃음) 재밌는 이야기가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솔직하게 말했으니, 재미와 공감을 느끼는 누군가가 있겠지?
지난해 연말에 유은이에게 선물을 주고 싶어서 어떤 색을 좋아하냐고 물은 적이 있어요. 유은이는 분홍색과 하늘색이 좋다더니, 잠시 뒤에 주황색, 노란색, 민트색도 좋아한다고 했어요. 결국 저는 여러 색깔의 선물들을 골라야 했죠. 그런데 알록달록한 유은이의 대답에 제 질문이 무색해진 건 어떤 계절을 좋아하는지 물을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유은이는 어떤 계절을 좋아하기보다 새로운 계절이 올 때를 다 좋아하는 것 같다며, 계절이 변할 때 왠지 설렌다고 말하더라고요. 하나의 답변을 기다리는 저에게 여러 가지를 이야기하는 유은이가 이상하게 좋았어요. 이상하게 좋은 친구가 사는 ‘이상한 집’에서 나와 길을 걸으면서, 유은이만의 다채로운 대답을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에 좋았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뻔하면 재미없잖아요.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삶을 두려워하는 저 자신에게 외쳤어요. 인생의 예측 불가능성을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삶을 다채롭게 즐길 수 있는 거야!
글/ 손유희, 사진/ 이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