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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May 18. 2022

문명의 목격자들

장애인 이동권 투쟁 현장

간격이 넓은 승강장, ‘1역사 1동선(교통약자가 스스로 지하철 역사 내부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동선)’이 확보되지 않은 곳곳의 지하철역뿐 아니라,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공간은 여전히 많다. 장애인들은 지금, 어디로든 자유롭게 출발하고 도착할 권리를 위해 힘차게 이동하고 있다. 권리보장의 다음 단계를 향하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장애인 이동권 투쟁 현장에 함께했다.


4 18 맘대로 정할  없는 출발 시간

‘장애인 권리예산 보장을 위한 인수위 답변을 촉구하는 삭발식’이 14일째 이어지던 날, 오전 8시 서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경찰들의 무전기에서 “‘휠체어 장애인들’이 이동하고 있다”는 말이 새어나왔다. 이날의 삭발자인 양선영(한울림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 씨는 이렇게 발언했다. “오늘 아침 5시부터 일어나서 준비를 했는데, 그럼에도 조금 늦었습니다. 장콜(장애인 콜택시)을 예약했는데도 늦게 도착해서 지각을 할 수밖에 없었거든요.” 그는 평소 지하철을 잘 이용하지 않는다. 허리에 핀이 박혀 있어 휠체어가 턱이나 단차를 지날 때 받게 되는 통증 때문이다.

전동차와 승강장 사이의 간격이 넓은, 단차가 큰 역에서 휠체어가 탑승하기 위해서는 역마다 ‘이동 발판’이 갖춰져 있어야 하고, 장애인이 이를 사용하기 위해선 직접 역에 연락을 해야 한다. 환승을 한다면 그 횟수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직원이 이동 발판을 가지고 오는 동안, 장애인 승객은 열차를 몇 대 보내야 할 가능성이 크다.

경복궁역에서의 삭발식 후, 활동가들이 혜화역으로 이동해 선전전 마무리를 하는 게 매일의 식순이다. 경로는 경복궁역→충무로역→명동역→한성대입구역→혜화역 순서. 비장애인이라면 거치지 않아도 될 역을 경유하는 이유는, 엘리베이터 탑승 횟수 때문이다. 


4 19연신 사과하다

전장연이 대통령직인수위에 답변을 요구한 기한 전날. 삭발식이 진행되는 경복궁역에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역에서는 ‘전국장애인철폐연대’라는 잘못된 명칭으로 단체를 지칭하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가 말했다. “장애인 철폐 연대가 아니라, 장애인 차별 철폐 연대입니다. 한국 사회가 장애인을 철폐하고 있지 않은지 묻고 싶습니다.” 그는 동대입구역으로 이동해, 지하철 문 사이에 휠체어를 멈춰 세웠다. “시민 여러분. 죄송합니다. 이 열차는 10분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지난 4월 16일, 이 역에서 발생한 승강장과 열차 사이에 한 지체장애인의 다리가 빠졌던 사고를 상기하기 위해서였다. 지나가던 시민이 “너무하는 거 아니에요? 출근은 해야 할 것 아니에요!”라고 소리쳤다. 박 대표가 설명을 이어갔다. “여기가 단차입니다. 장애인이 이 사이에 다리가 끼이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더 이상 그렇게 이동하기 싫습니다. 안전하게 이동하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시민들에게 연신 사과했다.


4 20여의도에 모인 휠체어

‘장애인의 날’이 아닌 ‘장애인차별철폐의 날’. 수많은 장애인들이 집회 참석을 위해 여의도에 모였다. 행사를 진행하는 연단에는 발언자들이 휠체어로 이동할 수 있도록 리프트와 경사로가 설치되어 있었고, 발언은 모두 수어로 동시통역 됐다. 

행진 중 만난 민들레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활동하는 서권일 씨는 인수위에서 장애계의 요구가 받아들여지긴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의견을 냈다. “그래도 목소리를 안 낼 순 없고, 받아들여질 때까지 이야기해야죠. 우리 장애인들이 이렇게 이동하는 건 너무 당연한 거잖아요. 그조차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게 ‘비문명 사회’라고 생각해요.” 옆에서 함께 행진하던 센터 소장 양준호 씨는 이번 집회와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 시위에 남다른 의미가 있다고 짚었다. “이준석 대표가 이런 형태의 시위 문화가 비문명적인 국가에서 행해지는 처사라고 하신 데에 아쉬움이 크죠. 공당의 대표인 분이 그렇게 말을 하면, 그 혐오를 따라 하는 이들이 분명 있으니까요. 그런 면에서 이 대표가 원하는 바를 달성했다고 생각해요.” 동시에 그는 ‘결국 원하는 결과를 이뤄낼 것’이라는 낙관을 비쳤다. “10년, 20년 전 서울 지하철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해달라고 말했을 때도 똑같은 비난을 들었지만, 그 결과 엘리베이터가 생겼고 많은 시민들이 편하게 이용하고 있어요. 그 과정을 모르고, 마치 평화롭게 엘리베이터가 생겼다고 여기는 분들이 많지만요. 시간이 지나면 시민들이 다르게 평가해줄 거라고 믿어요.”


4 21출근길당연히 지하철을 타다

전장연은 인수위에서 브리핑한 장애인 정책의 내용이 “21년째 외치고 있는 장애인들의 기본적인 시민권을 보장하기에 너무나 동떨어지고, 추상적인 검토”라고 밝혔다. 오전 7시, 경복궁역에는 재개된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 시위 참석을 위해 장애인들이 휠체어를 타고 모였다. 취재진과 휠체어, 비장애인으로 북적이는 와중 혐오 표현과 고성, 욕설이 승강장과 열차 안에 쏟아졌다. 한 사람이 욕을 하니 다른 이들이 동조했다. “다 잡아다 넣을 수 없어?”, “권리 주장하기 전에 니들 꼬라지를 좀 봐!”, “아주 내리고 타고 신났네!”. 이날 들은 폭언의 극히 일부다. 그 안에서 휠체어는 움직였고, 또 멈춰 섰다. 

전날 여의도에서 만났던 양준호 씨를 경복궁역에서 다시 마주했다. 차분한 표정이었다. 그는 “당연히 이 시위엔 의도가 있다.”고 말했다. “장애인 인권 보장 활동을 지지했는데, 이러면 지지를 해줄 수 없다고 하는 분들이 있잖아요. 전 그동안 어떤 지지를 해오셨는지 묻고 싶어요. 그럼 왜 장애인들은 아직까지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는 걸까요?” 그는 경찰의 대응에 대해서도 아쉬움을 표했다. “물론 휠체어 탑승 시위로 지연이 발생하긴 하지만, 경찰이 탑승을 중간에 막음으로써 더 지하철이 지연되는 것도 있다고 봐요. 답답한 부분이 있죠.”

전장연은 ‘집회시위 매뉴얼’을 통해 시민들과 만나는 방법을 많은 이들과 공유한다. 매뉴얼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우리는 모두가 진실의 한 부분임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진실을 전유할 수는 없습니다.” 출근길 지하철 탑승 시위로 발생한 비장애인의 불편함이 진실이라면, 21년간의 투쟁에도 이동할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시민이 존재하는 것 역시 진실일 것이다. 휠체어가 없으면, 출근길의 ‘문명’은 유지되는 것일까? 넓은 간격 사이를 오가고 승강장을 가로지르는 휠체어 바퀴를 본 우리 모두는, 분명 문명의 목격자다.


글과 사진. 황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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