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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Oct 27. 2022

내가 아는 세상이 평균이 아니니까

자립준비 청년들이 모여 있는 행사장에서 강의를 한 적 있습니다. 자립준비 청년이란, 아동복지 시설이나 공동생활 가정 등에서 보호를 받고 있다가 만 18세가 되며 해당 시설을 퇴소하는 이들을 뜻합니다. 이렇듯 보호가 종료된 후 막막한 시작을 해야 하는 청년들의 수가 해마다 2천 5백 명 정도 된다고 하는데요. 누군가에게 ‘독립’이라는 말은 새 출발의 설렘이 풍기는 달콤한 단어겠지만, 자기 말고는 믿을 이가 별로 없는 이들에게는 ‘자립’ ‘독립’ 같은 현실이 최대한 미뤄두고 싶은 두려움일 겁니다. 이들을 부르는 말로 예전에는 ‘보호종료아동’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최근 들어서는 ‘자립준비청년’이라는 표현으로 바꾸어 쓰고 있지요. 

강의 날짜가 확정되고 나면 담당자에게 사전에 참고하면 좋을 내용을 물어보곤 합니다. 참가자들 연령대는 어떻게 되는지, 성비는 어떻게 되는지, 원하는 강의 방향이 있는지 등등을 사전에 물어보고 참고하는 게 도움이 되거든요. 같은 주제로 말하더라도 고등학생이나 대학생, 직장인이나 주부 등 주요 참석 대상이 누구인지에 따라 사용하는 예시가 달라야 하니까요. 

저를 초청한 담당자가 소속되어 있는 회사는 대기업 산하의 재단이었습니다. 이 재단에서는 자립준비청년들이 미용이나 컴퓨터 등 자신이 선택한 자격증을 딸 수 있도록 비용을 지원하는 사회공헌 사업을 하고 있었어요. 신청자들을 대상으로 오리엔테이션을 하는 행사에 제가 초대된 것입니다. 그곳에서 10년 넘게 일했다는 담당자는 제게 주의할 점에 대해 알려주었습니다. 

일러스트 최산호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하실 때 주의 부탁드립니다. 전에 재테크 관련 강의를 진행한 적 있는데 강연자가 “부모님이 이 정도는 해주시지 않냐.” “하다 힘들면 부모님께 말하면 된다.” 등의 발언으로 대상자들이 크게 상처받고 항의해 온 적이 있습니다. 당연히 대상자를 고려해주시리라 생각되지만, 그 일이 생긴 뒤 주최 측에서도 조심스러워하고 있는 부분이라 알려드립니다.’

그 메일을 읽고 당황스러웠습니다. 그 재테크 전문가는 도대체 왜 그런 말을 했을까요? 사전에 분명히 행사의 성격을 안내받았을 텐데, ‘자립준비청년’의 뜻을 몰랐기에 단순히 독립을 준비하는 20대 청년들이라고 이해했던 걸까요? 아니라면, 그 뜻을 알았음에도 순간적으로 평소처럼 하던 말이 툭 튀어나와버린 걸까요? 

어떤 이유건 간에, 그 재테크 전문가가 평소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해왔는지는 분명합니다. 부모란 자식에게 기댈 구석을 제공하는 사람이고, 힘들면 기댈 수 있는 사람들이며, 경제적 지원도 어느 정도는 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걸 살아오면서 체험했고 주변에도 비슷한 환경의 이들이 많아서 이를 당연한 상식이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렇기에 “힘들면 부모에게 말하면 된다.” “부모님이 그 정도는 해주실 수 있다.” 같은 표현을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할 수 있었을 겁니다. 

자립준비청년들이 느닷없이 받았을 불쾌감이 그들을 만나고 와서도 한동안 마음에 남았습니다. 화자의 입장에서는 선의로 시작된 것이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무례하게 느껴지는 말이 있습니다. 악의로 시작된 말만 상대를 불편하게 하는 게 아니죠. 분명히 나는 기분이 나쁜데, 상대는 태평할 뿐 아니라 지금의 껄끄러운 상황을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민망스러워져서 그저 입을 다물게 되는 상황도 있지요. 

대학 때, 존경하던 교수님이 있었습니다. 보통 교수님들은 대학원생이 아닌 학부생들에게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 교수님은 대학생들에게 두루 애정이 있었습니다. 특히 아끼는 학생들을 교수실로 불러 진로 상담을 해주기도 하고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었지요. 책만큼이나 작은 화분이 많던 교수실에서 처음으로 보이차라는 것을 마셔본 기억이 납니다. 그 교수님은 제가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항상 시간에 허덕이는 것을 안타까워했습니다. 찻잔이 비어가자 다시 적당히 식은 차를 부어주면서 교수님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지금은 네가 돈 몇 푼을 더 벌려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최저시급 받겠다고 뛰어다닐 때가 아니라 공부를 할 때지. 부모님에게 설득을 하든 투쟁을 하든 지금은 용돈을 받아야 해. 아무리 형편이 좋지 않은 집이어도 그 정도는 부모님이 어떻게든 해주실 수 있어. 부모는 그러라고 있는 존재거든. 네가 정 미안해서 안 되겠다면 졸업하고 돈을 벌어서 갚으면 되잖아. 돈 버느라 흘려보내는 이 시간은 절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단다.”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저를 좋아하셨고,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학생이라고 판단했기에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그런 우려를 해주셨다는 걸요. 저는 그 말을 들으면서 “잘못 생각하고 있었네요. 그렇게 해볼게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한탄했습니다. 그 말대로 조르거나 설득해서 부모님에게 손을 벌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죄송스럽고 폐를 끼치기 싫어서 용돈을 받지 않았던 것일 뿐, 이제라도 마음을 바꿔먹기만 한다면 상황이 나아질 수 있는 거였다면 좋겠다고요. 그가 아는 부모의 범위는 자식에게 희생하는 사람들, 자식에게 경제적으로 지원을 어떻게든 해줄 수 있는 선 안에 있었습니다. 교수님의 의도를 이해했기에 화가 나지는 않았지만 아득한 거리감을 느낀 채 황급히 문을 닫고 돌아 나온 기억이 납니다. 

이는 흔히 말하는 공감 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공감 능력이란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만큼, 남도 이렇게 생각하겠지.’라고 가정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이 같은 공감 능력은 대부분 자신의 경험과 가치관, 주변에서 흔히 보이는 상황들로 한정된다는 겁니다. 코로나19에서 시작된 금리 인하와 그로 인한 유동성 증가로 부동산 거품이 최대이던 시기, 서울 평균 아파트 매매가가 11억을 돌파했다는 기사가 쏟아져 나올 때 의아해하는 사람들 앞에서 많은 전문가들이 이런 말을 하곤 했습니다. “요즘 웬만한 부부들은 맞벌이하면 연봉 1억이 넘습니다. 양가 부모가 집 한 채 정도는 사줄 수 있는 가구도 많아요. 서울 아파트 가격은 계속 오를 수밖에 없죠.” 하지만 2021년 기준의 통계청 기반 발표를 보면 순자산이 9억 이상 있는 가구는 상위 10프로에 해당합니다. 그런 전문가들의 주변에는 연봉 1억이 넘는 사람이 부지기수일지 모르겠으나 인구 전체를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출처: Unsplash

<공감의 배신>이라는 책에서 저자 폴 블룸은 이런 말을 합니다. 공감이란 관심과 도움이 필요한 곳을 환히 비추는 스포트라이트와 같기에 자기와 비슷하거나 관심 가는 것에만 불빛이 가기 쉽다고요. 반대로 그렇지 못한 주변은 어두워져 잘 보이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공감은 ‘우리가 좋아하고 친숙하게 여기는 사람’만을 돕게 한다는 겁니다. 그렇기에 블룸은 공감이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보고 현실을 왜곡할 수 있다고 우려합니다. 


선의로 입히는 상처


공감 능력은 분명 인간다움을 지키게 하는 위대한 마음임에 틀림없습니다. 문학작품을 읽는 이유는 이처럼 제한될 수밖에 없는 간접경험의 범위를 넓혀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여기에만 지나치게 기대면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상황 위주로만 타인을 판단하는 자기중심성이 강화될 수 있습니다. 왜곡된 인식이나 말실수의 가장 큰 이유는 이 같은 자기중심성에서 오는 경우가 많거든요. 

자기중심성이란, 자기 입장에서 보이는 것만 중시하고 타인의 관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뜻합니다. 관련해 유명한 실험이 있는데요. 어린아이들에게 세 개의 산 모형을 보여주고 나서 반대편에 있는 인형에게는 그 모형이 어떻게 보일지 묘사해보라고 했더니 아이들은 자기의 관점과 인형이 보는 관점이 똑같을 거라고 가정했다는 겁니다. 자기중심적인 행동은 대개 어린아이들에게서 일반적으로 나타나지만, 성인이 되어갈수록 여기서 서서히 벗어나게 됩니다. 어릴수록 세상의 중심이 나라고 느끼지만 점차 성장하면서 그렇지 않다는 걸 느끼는 이유도 이 같은 자기중심성에서 멀어지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하면, 성인이라 하더라도 자기의 관점에만 갇혀 있으면 어른스럽지 못하다는 뜻도 되겠습니다. 

“당연히 ~ 라면 ~ 하겠지”라는 가정하에서 한 판단이나 발언이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 경우에도 공감 능력을 발휘한답시고 “여자라면 ~ 한 거 아닐까” “요즘 직장인들은 다들 ~ 하잖아” 같이 제 기준에서 단정하는 말을 해왔다고 느낍니다. 예컨대 저는 누군가가 자존감이 없어서 고민이라고 하면 어릴 때 부모에게 사랑이나 인정을 받지 못해서일 거라 지레짐작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어느 날 후배가 저와 그런 유의 이야기를 하다가 단호하게 말하더군요. “아니요. 저희 부모님은 사랑을 충분히 주셨어요. 제 불안은 그것과는 상관없는 것 같아요.” 그때 크게 뜨끔했던 기억이 납니다. 공감한답시고, 네 마음을, 네 상황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척하면서 결국은 편견만을 공고히 해왔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강의를 하게 되면서 전에는 만나보지 못했을 다양한 환경의 사람들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한때 저도 청중들과 같은 상황인 적이 있었습니다. 고등학생인 적이 있었고 대학생인 적도 있었고 직장인인 적도 있었지요. 하지만 그때들은 너무 멀어져서, 과거의 개인적 경험은 지금도 적용할 수 있는 공감대가 아니라는 걸 자주 체감합니다.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에 강의를 갔더니 아이들이 모두 4시 전에 하교를 하고 있더군요. 야간자율학습을 끝내고 나면 버스가 끊기던 저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겁니다. 그걸 모르면 나도 고등학교 시절을 겪어봤답시고, 그래서 공감한답시고, 잘 알고 있다며 초점이 빗나간 위로를 빗나가게 되겠죠. 

공감 능력이 가닿지 못하는 부분 또한 많다는 한계를 직시하고, 말을 할 때 ‘모두가 나 같을 거라고 생각하는 자기중심적 렌즈를 정기적으로 체크해보는 것. 커뮤니티스러운 인간관계에만 갇혀 있지 않고 다양한 입장을 접해보면서 화각을 넓히는 것. “나는 네 마음을 잘 알아.” 가 아니라 “네 마음이 어떤지 궁금해.”라고 말할 수 있는 마음. 선의로 한 말이 상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말하기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 상대에게 어떤 말을 해주기 전에 상대가 처한 상황이 얼마나 개별적인지부터 알아가야 하겠지요. 말을 잘한다는 건 주장하고 싶은 내용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상대가 듣고 싶었던 말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 눈높이에 맞추어 시도하는 관심에서 시작된다는 걸 저는 요즘 깊이 체감하고 있습니다. 


글. 정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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