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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Oct 27. 2022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첫 번째 만남

우연을 기다리는 유연함으로

1년 만에 부산이다. 올해도 부산국제영화제를 맞아 열흘 가까이 부산에 머문다. 큼지막한 캐리어가 있으니 시작부터 진 빼지 말자. 서둘러 택시를 잡아탄다. 부산역을 빠져나와 얼마 뒤, 광안대교를 건너면 비로소 ‘여기가 부산이구나, 부산에 왔구나.’ 한다. 오랜 기항지, 거대한 선박과 빽빽하게 들어찬 컨테이너들, 부산 특유의 고지대와 비탈진 산자락, 그 경사지에 촘촘히 들어찬 삶의 흔적들, 그와는 확연히 비교되는 아찔하리만치 높은 프리미엄 아파트들, 요트 선착장, 파고를 숨긴 짙디짙은 바다, 아무 일 없다는 듯 말간 하늘, 그리고 오늘따라 유달리 거대한 구름 떼까지. 광안대교를 건너는 택시 안에서 차장 이쪽과 저쪽 너머를 분주히 본다. 부산에 도착했음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이와는 전혀 다른 풍경의 서울이었는데. 이동이 준 풍경의 격차다.

올해 초의 다짐을 되돌아본다. 여기저기로 옮겨 다니는 일의 특성상 봇짐장수, 보부상의 생활을 하다 보면 1년 내내 전국을 누빈다. 그때마다 대부분 일만 하고 집으로 돌아왔던 것 같다.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 생각하기로 올해는 어떻게든 일하면서 딴짓을 좀 하자, 눈을 돌려보자, 일하지 않는 시간을 만들어보자 다짐했다. 일하면서 좋았던 곳에 일하러 가는 게 아니라 그냥 한번 가보자고 했다. 1년 만의 부산행이다. 영화제 일로. 벌써 ‘부산에 다르게 와야 하는데’ 한다. 아, 도착한 지 얼마나 됐다고.

부산 해운대구의 '영화의전당'


고진감래  상영


모더레이터로서의 일정 시작이다. 영화 상영 직후, 창작자와 관객이 영화에 관해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책임지고 진행하는 게 내 일이다. 규모가 꽤 큰 국제영화제다 보니 영화의 상당수가 ‘월드 프리미어’이거나 ‘아시아 프리미어’다. 세상에 처음 공개되거나 아시아 관객과 처음 만난다는 의미다. 영화를 기획하고 제작비를 마련하고 촬영을 거쳐 후반 작업에 이르러 최종 완성되기까지 어느 하나 수월한 과정이 있었을까. 영화의 첫 상영은 만든 이들의 고진감래일 것이다. 영화가 창작자의 손을 떠나 그토록 오랫동안 만나고자 했던 관객들 앞에 제 모습을 드러낸다. 모든 상영이 중요하겠지만 영화의 첫 상영 때는 조금은 남다르다. 극장 안에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분 좋은 긴장과 설렘이 진동한다. 감독, 배우, 스태프 들뿐만 아니라 관객들도 이 긴장을 함께 만들고 같이 느낀다. 물론, 나 역시 그렇다. 이 공기를 느끼며 그러나 이 공기에 압도되거나 흔들리지 않은 채 무리 없이, 즐겁게, 관객과의 대화를 시작하고 마치길 바란다.

어떤 영화를 맡아 진행할지를 모더레이터가 직접 고를 수 있는 건 아니다. 물론, 영화제 측과 의견을 나눌 수 있겠지만, 매번 그럴 수 있는 여건은 아니다. 많은 경우, 내게 주어진 영화와 우연처럼 만난다. 뭐랄까. 그건 또 그것대로 ‘괜찮다.’ 저 영화와 내가 무슨 인연이 있는 걸까 하면서 만나게 된 이 우연을 최대한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만난 첫 번째 우연은 정주리 감독의 두 번째 장편 <다음 소희>(2022)다. 지난 5월에 있었던 칸국제영화제 비평가주간 섹션의 폐막작이다. 장편 데뷔작 <도희야>(2014)로 칸국제영화제의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을 비롯해 많은 관심을 받은 감독의 8년 만의 신작이기도 하다. ‘차기작이 기다려지는 감독’ 하면 늘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그 이름을 이곳에서 보니 반가운 마음이다. 고진감래의 순간을 함께한다.


<다음 소희다음은?


<다음 소희>가 전해오는 이야기의 무게감이 만만치 않다. 특성화고등학교 3학년 소희(김시은)는 졸업을 앞두고 콜센터로 현장실습을 나간다. 영화는 실제로 전주에서 있었던 콜센터 현장 실습생 자살 사건을 모티브로 삼았다. 그런 만큼 현장실습이, 콜센터 노동이 얼마나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가를 생생하게 목격하게 된다. 과도한 콜 수 경쟁으로 노동자들을 내모는 기업의 문어발식 경영, 하청의 하청의 하청 노동의 고리, 그 속에서 가장 취약한 고교 실습생의 자리, 여성 노동자를 향해 무참히 계속되는 고객들의 성희롱과 위협, 무뢰한 정글 한가운데 소희가 있다. 문제는 회사에만 있는 게 아니다. 학교 운영비와 미래가 마치 졸업생들의 취업률에 달렸다는 듯 구는 학교는 학생이 겪는 어려움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기업처럼 실적과 결과만 외치기 바쁘다. 부모는 어떤가. 소희가 무엇을 원하는지, 하고 싶은 건 있는지 모른 채 ‘대기업’에 실습을 나간 딸이 자랑스럽고 뿌듯하다. 소희와 비슷한 처지에 내몰린 또래 친구들도 각자의 현실을 감당하기에 벅차다. 

영화 <다음 소희> 스틸

소희가 직면한 암울한 현실의 연쇄를 꼼꼼하게 그려가던 영화는 중반 이후부터 소희의 비극의 연유를 되밟아 나간다. 이 뒤늦은 추적이 더욱 아린 건 신음하던 소희를 그 누구 하나 궁금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프게 환기해오기 때문이다. 이 사회의 시스템과 어른들이 소희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일까. 어떤 유의 비극은 단 하나의 명징한 이유로 발생하지 않는다. 겹겹의, 연쇄의 원인 그 속에서 침묵한 입과 방관한 눈 속에서 오랜 시간 꾸준히 퇴적돼온 결과다. 열아홉 살 외주업체 노동자의 죽음, 현장실습 고교생의 죽음,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의 죽음…. 뉴스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언제까지 이 비극을 반복할 것인가. 새삼 영화의 제목 <다음 소희>를 다시 곱씹어본다. 소희 다음이 또다시 소희라면? 그건 너무도 끔찍하다. 영화는 비참한 현실에 관한 보고서의 수준에 머물 생각이 없다. 지금 이렇게는 더 이상 안 된다고, 우리 정신 차려야 한다고 세차게 흔들어 깨우는 목소리가 있다. 열아홉 소녀, 소년 들에게 ‘너의 탓이 아니라고, 힘들 때 내가 있음을 기억하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 <도희야>의 영남(배두나)에 이어 <다음 소희>의 유진(배두나)이다. 이 사람이 있어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싶다가도 이 사람만으로는 안 된다는 절박함이 밀려온다.


다음 우연


이제 막 부산에서의 첫 일정, 첫 번째 관객과의 대화를 마쳤다. 처음 공개된 영화는 또 어디로 날아가 누군가의 마음을 흔들어 깨울까. 극장은 또 어떤 우연의 이야기를 만들어낼까. 영화제 기간 나는 또 어떤 영화와 관객과 만날까. 일정에 매여 자유로이 부산을 누빌 수는 없다지만, 유연한 마음으로 극장 주변을 배회하고 싶다. 일단은 그렇게. 다음 부산을 기약하며. 


글. 정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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