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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Oct 27. 2022

가짜뉴스 속에서 일단 대충 살아남기

드디어 마지막 편이다. 지난 다섯 편의 글에서 가짜뉴스의 등장에서부터 현재, 그리고 그 속성까지 다양하게 다뤘다… 고 말하고 싶지만, 그냥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만 단편적으로 했던 것 같다. 그래도 마지막 회니 어쨌든 결론을 내야겠다. 우리는 가짜뉴스를 어떻게 막아낼 것인가?

사회는 지난 수년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대응해왔다. 팩트 체크는 가장 중요한 덕목이 됐고, 국회에서는 처벌법을 만들려고 했으며, 시민단체들은 좋은 언론과 나쁜 언론을 가리려고 했다. 하지만 이는 언제나 논란만을 낳았을 뿐 본질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진 못했다. 왜냐면 당신이 어떤 정치 성향을 가졌든 상대편은 늘 가짜뉴스를 퍼트리는 나쁜 집단이었으니까. 팩트 체크도 효과적이지 못했는데, 상당수의 가짜뉴스가 터진 당시에는 즉각적으로 팩트 체크를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이다. 선거를 앞두고 선거에 영향을 줄 만한 큰 스캔들이 터졌다고 해보자. 이 스캔들이 사실인지 아닌지 밝혀지기 전에 선거가 끝날 것이다. 한참 후에 진실이 밝혀진다 한들 이로 인해 선거 결과를 번복할 수는 없다. 그랬다간 양 지지자들이 충돌하면서 내전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물론 시간은 상당수의 가짜뉴스를 걸러내준다. 아무리 언론이 썩었고, 학계가 타락했다고 하더라도 세계에는 좋은 언론과 양심적인 학자들이 남아 있고, 그들은 자신들의 시간을 태워 가짜뉴스를 밝혀낸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이해할 정도로 한가하지 않다. 무엇보다 관심이 없다. 대다수 사람들은 오늘 핫한 뉴스를 소비하기에도 바쁘다. 글을 써서 먹고살기에 일반 시민들보다는 팩트 체크에 더 민감해야 할 나도 가짜뉴스에 여러 차례 속았다. 심지어 이런 잘못된 정보를 글이나 강연에 사용한 적도 있다. 다행히 교양 있는 이들 덕분에 재빨리 수정할 수 있었지만, 가짜뉴스에 속아 틀린 정보를 퍼트렸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러니까 애초에 ‘가짜뉴스를 완벽히 막아낸다.’는 접근 자체가 잘못됐다. 안타깝게도 가짜뉴스를 완벽히 박멸할 방법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짜뉴스를 줄이려는 노력과 동시에 가짜뉴스와 함께 살아갈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걸 위해 나도 이제까지 이 칼럼을 쓴 것이고. 지금까지 내가 익힌 ‘터프’한 방식은 두 가지다.


 가지 방법


첫 번째는 틀렸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결국 틀릴 수밖에 없다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물론 처음부터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에는 침묵할 것을 요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입을 다무는 것이 좋은 해결책이 아니다. 과도한 팩트 체크의 문제는, 지각 있는 사람들은 틀릴 것을 두려워해 입을 닫게 하고 그걸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사이버 렉카나 황색 언론들은 계속 떠들게 만든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정말 확실히 정해진 것은 별로 없다. 그 이전에 의견이 나와야 한다. 그러니 일단 저지르고 틀렸다면 사과하는 수밖에. 물론 내가 양심적인 학자 타입의 인간은 아니지만, 하여튼 생계는 유지해야 하니 모르는 말도 할 수밖에.

출처: Unsplash

 지난 7월 <뉴욕타임스>는 “내가 틀렸습니다(I was Wrong)”라는 기획기사를 내보냈다. <뉴욕타임스>의 저명한 8인의 칼럼니스트는 지난 시기 자신이 썼던 글 중 잘못된 내용이나 예측을 고백했다. 단순히 형식적인 반성만 한 것이 아니라 왜 그 글이 섣부른 판단이었는지, 당시 간과한 것은 무엇이었는지, 그때와 지금 달라진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성찰도 담긴 좋은 기사였다.

틀렸다면 인정하는 것이 당연한 것 같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과오를 잘 인정하지 않는다. 특히 어느 정도 권위가 있는 사람들은 더 하지 않고, 정치적으로 양분화된 사회에서는 더더욱 하지 않는다. 사과가 얼핏 진영 전체의 잘못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으로 보자면 인터넷의 발달로 그 사람이 쌓아 올린 모든 것이 부정되고 두고두고 조리돌림 당할 수도 있다. 대중은 종종 단호하며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니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사회적으로 발언할 힘을 가진 이라면 욕을 먹더라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대중들도 타인의 실수에 조금은 너그러워져야 하고. 사람들은 사과하는 이를 용서해주면서 “실수를 하지 않았다면 더 좋았겠지만”이라는 말을 덧붙이곤 하는데 이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실수는 필수적이다. 중요한 건 대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인정은 결국 사건이 벌어진 뒤 일어나는 수습 단계니까. 그래서 다음이 더 중요하다. 

두 번째 방법은 더 간단하다. 나(우리 편)에게는 엄격하게, 그리고 타인에게는 관대하게 구는 것이다. 자기계발서는 우리 사회에 몇 가지 폐해를 줬는데, 그중 하나가 자존감을 강조하면서 ‘자신을 믿어라’라는 메시지를 필요 이상으로 광범위하게 퍼트렸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존감 과잉의 시대에 살고 있다. 물론 자존감이 필요하다는 충고가 필요한 박약한 이들도 많다. 하지만 내가 느끼기에 사람들의 80% 이상은 이미 자기 확신에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자신의 주장만, 자기 편만 옳다고 믿는다. 

이는 앞서 말한 양분화된 정치 환경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알고리즘 덕에 우리는 갈수록 나와 비슷한 의견만을 흡수하고 자기 확신을 강화한다. 지난 글에서 여러 차례 강조했듯이 문제가 되는 대다수의 가짜뉴스들은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다. 돌이켜보라. 우리는 자기주장에 동조하는 가짜뉴스는 팩트 체크 없이 쉽게 받아들인다. 설혹 잘못이 드러난다 해도 더 관대한 잣대를 들이대고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라고 옹호한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자신의 정치색이 어떻든 간에 무조건 반대편이 가짜뉴스를 퍼트린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사실 이 가짜뉴스는 당신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면 당신이 말한 대로 가짜뉴스인 걸 누구보다 당신이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 당신이 조심해야 할 것은 오히려 우리 편이 퍼트리는, 내 기호에 맞는, 진짜라고 믿는 가짜뉴스다.

출처: Unsplash

내가 실수할 수 있고, 우리 편이 잘못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그 사실을 인지한다면 감싸주는 것이 아니라 더 엄정하게 대처해야 한다. 나와 우리 편엔 더 가혹해도 된다. 왜냐면 나는 이미 누구보다 그 사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양편을 동등하게 대한다면 분명 우리 쪽에 더 관대해진다. 그러니 자신을 가혹하게 대하라. 반대로 상대편은 너그럽게 대하라. 왜냐면 당신을 그들을 모르기 때문이다. 상대편도 당연히 가짜뉴스를 퍼트리겠지. 그렇다면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다 그들이 그런 가짜뉴스에 휘둘리는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그들을 이해하면 조금은 관대해질 수 있다. 


 칼럼의 뻔한(?) 결론


우리가 가짜뉴스를 비난하는 이유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지 누군가와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정쟁을 하는 것도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지 상대편을 박살 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의 인생은 게임이 아니다. 우리가 이긴다고 사회가 건강해지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이 당연한 사실을 너무도 쉽게 잊는다. 언제나 그렇듯 가짜뉴스는 가짜가 아니다. 그 뉴스는 가짜지만, 그 가짜는 현실에서 퍼진다. 

나에겐 가혹하게, 타인에겐 관대하게. 그리고 잘못한 것이 생긴다면 인정하고 사과할 것. 결론이 너무 뻔하고 하찮아서 죄송할 따름이다. 하지만 이런 태도만 가져도 우리는 가짜뉴스 속에서 중심을 잡을 수 있다. 물론 그럼에도 실수는 있을 것이고, 때때로 잘못된 판단을 내릴 것이다. 어쩌면 그런 태도로 남들보다 조금 더 많은 손해를 볼 수도 있다. 남들은 당신에게 관대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크게 보면 이 방향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일단 나는 대충 그렇게 믿기로 했다. 


글. 오후(oh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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