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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Oct 27. 2022

탱고 추는 노인은 행복하다

친구 E의 출산이 얼마 남지 않았다. 기분이 이상하다. 적당히 아는 사이거나 학창 시절 ‘친구였던 이’가 출산했다는 소식은 10년 전부터도 들려왔지만 그때는 무심했다. 그렇구나, 하며 사회적으로 학습한 반응을 기계적으로 돌려줬던 것 같다. 이번에는 다르다. 여러 생각과 다채로운 감정이 일어난다.

E가 특별한 친구 중 하나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깊은 친구’라고 느끼는 존재가 많지 않다. 그마저도 가변적이라고 느낀다. 서로의 인생 한순간 진실로 마음을 터놓고 자주 보며 즐겁게 지내다가도, 시간이 지나 서로의 방향성이 달라지면 서서히 멀어지거나 갑작스레 단절될 수 있는 게 우정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마음을 깊이 나누며 관계가 유지된다? 드물고 귀한 일이다. E와의 관계도 그렇다.

E를 처음 알게 된 때는 지금으로부터 10년도 더 전이다. 언론사 입사 준비 아카데미 수업을 들었을 때다. 나는 수업을 들은 뒤로도 계속 언론사 입사를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언론사에 들어가지 않고서도 언론 활동을 하는 법을 모색하다 직접 1인 잡지를 창간하고 발행하기로 했다. E가 잡지의 기고자이자 독자위원회 일원으로 활약하며 우리는 더 가까워졌다.

그 뒤로도 E는 많은 도움을 줬다. 부족한 예산으로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 때, E는 식사를 대접받는 것 외에는 아무 대가도 받지 않고 촬영을 도왔다. 내가 코로나19에 걸렸을 때, E는 혼자 사는 나를 걱정해 과일과 죽과 반찬을 한 보따리 싸 들고 집 앞까지 찾아와 문 앞에 두고 갔다. 그러고 보니 나는 E의 반만큼도 다정하지 못했는데, E는 왜 나 같은 애랑 10년 넘게 친구 하고 있지?

아마 이야기가 잘 통해서가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우리는 같은 것을 보며 분노하고, 같은 것을 보며 웃는 사이니까. 모든 부분에서 생각이 같지는 않지만 많은 경우 관점이 일치했고 자주 깊은 공감대를 형성했으니까. 일테면 한국 사회가 얼마나 지독한지에 대해서 말이다. 지독한 경쟁, 대부분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주의 사고방식, 그로 인해 ‘패자’가 겪게 되는 모멸감과 자기혐오. 점점 심해지는 빈부 격차와 높아지는 자살률, 그리고 탐욕과 불안을 부추기는 사회 분위기 등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대체로 비슷했다. 만날 때마다 예쁜 것을 보고 맛있는 것을 먹으며, 1인분의 몫을 하며 살기 위해 끝없이 자기계발에 힘쓰며 스스로를 갱신해야 한다고 등 떠미는 사회를 사는 일의 피로감과 불안감을 나누고 서로를 위로했다. 기후위기를 심각하게 인식하며 지금과 같은 자본주의 체제 아래 기후위기는 멈추지 않을 것이며 인류의 삶은 더 나빠질 것이라는 비관을 공유하기도 했다.

출처: Unsplash

그래서 궁금했던 것이다. 왜 E는 이런 세상에서 아이를 낳는 것일까? E에게 묻자 그는 “이 사람(배우자)과 나 닮은 아이, 낳아보고 싶었어.”라고 말하며 웃었다. 그 대답을 유전자를 남기고 싶은 본능의 결과라며 진화심리학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배우자가 경제적으로 안정되었기에 내린 계급적 선택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거기에 사랑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분명히 보였다.


도래하는 초고령 사회


사랑하는 마음으로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아 기를 부부를 보며 오랜 기억이 떠올랐다. 나도 아주 옛날에는 그런 것을 꿈꾼 적 있음이 떠오른 것이다. 이 역시 10년도 더 전의 일이다. 하지만 그동안 여러 일을 겪고, 잘 몰랐던 스스로를 알아가며 그 생각은 변했다. 안전한 이별이 어려웠던 경험(에 대해 혹시 자세한 내용이 궁금한 독자분들은 귀띔해주시길. 풀 ‘썰’은 많다)은 트라우마를 남겼고 타인과 안심하고 사랑하며 연애하는 일을 두렵게 만들었다. 사랑과 연애조차 두렵고 어려운데 결혼과 출산? 이제 관심도 흥미도 없다.

게다가 홀로 생계를 꾸리고 스스로를 돌보며 살아가는 일상에 제법 만족하고 있다. 생계를 책임지는 일은 때때로 고단하지만, 그래도 스스로를 벌어먹인다는 자긍심이 있다. 탱고 덕이 클 것인데, 여가 시간도 만족스럽게 보낼 때가 많다. 이런 삶이 결혼으로 인해 질적으로 훼손될 수 있다는 경계심을 가지고 있다. 좋은 결혼은 아끼고 배려하며 보살피고 돌봐주는 사랑과 호혜의 공동체를 이루게 하겠지만, 불행히도 ‘웬수(원수가 표준어지만 웬수의 발음이 더 정서를 잘 표현하는 것 같아 이렇게 말하겠다)’만 생기는 사례도 많은 것으로 안다.

심지어 그 웬수가 한 명이 아니라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여럿 딸려오는 경우도 많다. 결혼을 두 개인이 공동체를 이루는 일이 아닌 집안 간의 결합으로 인식하는 이들이 아직도 한국에 많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성역할도 고정 지으며 여성에게 살뜰한 ‘며느리’ 역할을 요구하고 결혼 생활의 스트레스를 증폭시킨다. 게다가 혼자 살면 1인분만 책임지면 되지만, 동거인이 늘어나면 가사노동과 돌봄 노동의 총량이 늘어난다. 그렇게 늘어난 일이 모두 내 몫이 된다면? 내가 가사노동 할 동안 남편은 헤드셋 끼고 게임이나 하고 있다면? 웬수로 느끼지 않을 자신이 없다.

웬수와의 결합이 두려운 데 더해, 앞날에 낙관을 가지기 어렵고, 1인분의 삶을 살기에도 버겁기에 혼인율와 출생률이 그토록 낮은 것 아닐까? 계속해서 ‘역대 최저’를 갱신하는 통계를 또 일일이 늘어놓을 필요는 없으리라. 태어나는 아이는 적고 사람들은 갈수록 오래 살기에 머지않아 한국이 초고령 사회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이미 널리 퍼져 있다.

이에 위기의식을 갖고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황당하게도 젊은 여자들을 탓한다. 결혼도 출산도 하지 않는 여자들이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동의 안 되는 말이지만 설사 그렇다 치더라도 타인을 고통스럽게 만들며 개인의 행복만 챙기는 일이 아니라면, 시민으로서 공동체에 해야 할 의무를 다하고 있다면, 개인이 내린 합리적인 선택을 타인이 비난할 자격 있을까?

정말 이기적인 사람들은 임산부의 구체적인 삶과 고통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남의 몸에 대고 이래라저래라 쉽게 말하며 통제하는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나 역시 가까운 친구가 겪기 전까지 임부의 어려움에 관심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는 사실이 부끄럽다. 소중한 친구가 임신을 하니 얼마나 몸이 힘들지 가늠하게 되고, 마음이 쓰이며 일상의 불편을 헤아리게 된다. 출산 뒤에도 문제다. 친구가 아직 아이를 떨어뜨려 놓기 어려울 때 그와 어떻게 만날지 생각하니, 아이에게 관용이 부족한 공간들에 대해서도 돌아보게 된다.

출처: Pixabay

고령화와 저출생이 걱정된다면, 사랑하니까 같이 행복하려고 아이를 낳고 싶어 하는 부부들이 ‘현실적인’ 문제로 출산을 포기하는 일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경쟁에서 패했다고, 가난하다고 멸시하지 않고 사회적 지위나 성별에 따른 차별 없이 모두가 존중받으며 생의 불안을 경감시키는 사회가 되어야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더욱 시급한 것은 아이에게 친절하고 관용적인 사회가 되는 일일 것이고. E는 이렇게 세상이 바뀌리라는 희망으로 출산을 결심하지 않았을까?


탱고 고령화 명과 


그런데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이쯤 되면 ‘인구 문제와 탱고가 무슨 상관이기에 이런 얘기를 길게 하지?’라는 의아함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아주 상관이 많다. 고령화 현상이 한국 탱고 커뮤니티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내 경험상 서울의 탱고 커뮤니티의 주류는 40대 중후반과 50대다. 그리고 20~30대보다는 60대가 더 자주, 더 많이 눈에 띈다. 2022년 한국의 중위연령이 45세라는데 탱고 커뮤니티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는 셈이다.

나로서는 아쉽다. 탱고는 그 자체로도 재밌지만, 마음에 맞는 더 많은 또래 친구들과 함께 한다면 더 신나고 재밌을 것으로 예상됐다. 나만 그런 아쉬움을 느낀 게 아닌지, 얼마 없는 젊은 탱고인들끼리 모일 때마다 탱고에 더 많은 젊음이 유입되게 만들 기획과 전략에 대해 거의 회의 수준으로 얘기를 나눈다. 그중 하나는 ‘스트릿 탱고 파이터’를 개최하자는 아이디어인데… 얘기하다 ‘현타’ 와서 “그냥 포기하고 지금 있는 사람들과 다 같이 계속 늙어갈 것을 받아들이자.”는 결론으로 마무리됐다.

사실 ‘탱고 고령화’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위안을 주기도 한다. 내 나이 30대 후반, 보편 사회 기준으로 적은 나이는 아니다. 그런 자각을 할 때면 불안하고 조급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나 탱고 커뮤니티에서는 상대적으로 새파란 젊은이잖아?’ 이를 체감할 때면 보편적인 생애주기의 압박을 잊고 느긋한 태도를 갖게 되는 것이다. 또한 춤추며 행복해하는 어르신을 보는 일도 좋다. 나도 저 나이에 지금의 어르신들처럼 계속 춤추고 즐겁게 살 수 있겠구나, 싶어서.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탱고 커뮤니티 문화인데, 이곳에서는 사회적 지위 따지지 않고 오직 탱고를 매개로 대화하며 인간 대 인간으로 친해지는 게 규칙이다. 나이 지긋한 분들이 그렇게 허물없이 마음을 나누고 웃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가끔 ‘어르신 유머’ 때문에 복잡해질 때도 있지만 대체로) 좋아진다. 나도 탱고로 맺은 우정을 노년까지 이어가고 싶다는 희망을 가지게 된다.

갑자기 드는 생각인데, 행복한 노인들이 많다면 고령 사회여도 괜찮은 것 아닌가? 고령 사회의 실질적인 대책은 ‘출산 장려’보다 노인이 되어서도 행복하고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일 아닐까? 일단 탱고 추는 노인은 행복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래도 아직 또래 친구들이 좀 더 많이 탱고 커뮤니티에 유입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완전히 거두지 못했다. 일단 E가 무사히 출산하고, 아이가 젖을 뗀 뒤 육아를 다른 이들과 더 많이 분담할 수 있을 즈음, 탱고 추러 오면 좋겠다. E의 아이가 두발로 걷기 시작하면 아이에게 ‘조기 탱고’를 시켜보는 것도 좋을 것 같고. 


글. 최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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