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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Nov 25. 2022

빌런을 위한 영화는 없다

슈퍼히어로의 정신 건강은 누가 챙기나

최근 개봉한 <블랙 아담>에 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슈퍼히어로 영화 속 빌런의 위치에 대해 잠깐 짚고 가자. <블랙 아담>은 ‘빌런’이 주연인 영화, 혹은 DC/워너가 ‘빌런’의 기원을 다뤄 성공시킨 <조커>의 전략을 이어갈 영화처럼 보였다. 메인 포스터 문구도 ‘세상을 구할 것인가 파괴할 것인가’여서, 블랙 아담의 ‘블랙’을 피부색이 아닌 ‘안타고니스트’의 의미로 받아들이게끔 유도했다.

하지만 슈퍼히어로 영화 가운데 지금껏 ‘악역’이 주인공을 맡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흔히 ‘빌런’이라고 지칭하는 캐릭터들은 시공을 떠나 어디서든 어두운 자의식을 드러낸 채로 존재감을 뽐냈지만, 주연 자리는 꿰찰 수가 없었다. 

이에 대해서는 마블과 DC의 상황이 묘하게 같으면서도 다르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가 쉽게 망가지지 않고 견고하게 유지될 수 있었던 건 존재하는 것들의 절반을 날려버리려 시도했던 타노스가 굳건하게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꺾어야 할 절대적 존재야말로 히어로의 존재 이유니까. 타노스가 부재한 지금의 MCU 상황을 보자. 히어로들이 멀티버스 안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게 모두 반드시 꺾어야 할 절대적 존재, 매력적인 빌런이 없어서다. 

애초에 존재감 있는 빌런이 부재했던 DC 확장 유니버스(DCEU)의 상황은 더욱 난장판이다. <맨 오브 스틸>을 시작으로 <블랙 아담>에 이르기까지 11편의 DCEU 영화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계속해서 외부의 적이 아닌 내부의 적과 싸워왔다는 인상이 강하다. 슈퍼히어로라는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슈퍼맨과 배트맨이 가졌던 직업 윤리관의 차이 내지는 정치적 견해 차이는 오랜 팬들을 지치게 만들었다. 이들을 화해 모드로 전환시킨 버튼이 ‘엄마’라는 키워드였다는 점도 주목하자. 그리고 ‘저스티스 리그’의 멤버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는 과정, 즉 그들 자신의 트라우마와 먼저 싸워 이겨야 했다. 지난 10여 년간 DC의 히어로 멤버들이 맞붙었던 빌런 캐릭터 이름이 기억나는가. 하다못해 둠스데이와 스테판울프의 사진을 두고 이름을 맞출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DC가 유니버스를 아무리 확장한들 조커를 넘어설 빌런 캐릭터를 등장시키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조커>는 마블도 해내지 못한 놀라운 성과를 거뒀고 마블은 결코 ‘타노스’를 주연으로 한 영화를 만들어서 <조커>만큼 성공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슈피히어로 영화 세계 안에서 빌런 캐릭터가 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이유와 <조커>의 리얼리티 전략을 같은 맥락에서 비교할 수는 없지만, 마블과 DC가 현재 경쟁력 있는 매력적인 빌런의 발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흐름이다. 


그렇다면 빌런인가안타고니스트인가

길게 돌아왔지만 DC의 <블랙 아담>은 제대로 된 ‘블랙’, 즉 빌런의 매력을 보여줘야 하는 숙명을 띠고 있는 영화다. 아니,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그러리라 짐작했다. 영화는 ‘빌런’에 대한 관객의 진지한 기대를 조금은 엉뚱한 방식으로 비켜나간 영화였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블랙 아담>은 <조커>의 리얼리티 전략을 취하고 있는 영화가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장르적으로 한데 섞이기 어려워 보이는 DCEU의 여러 캐릭터들, 즉 ‘저스티스 리그’와 ‘수어사이드 스쿼드’라는 다소 이질적인 팀의 접목을 꾀하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MCU의 수많은 히어로들이 쉴드의 수장 닉 퓨리(사무엘 L. 잭슨)의 지휘 아래 모이듯이, DCEU의 세계에서도 아만다 윌러(비올라 데이비스)라는 조직의 리더 격의 인물이 필요하고 그를 중심으로 지금껏 개별 행동을 해왔던 히어로 팀들이 한데 모일 구실이 필요했을 것이다. <블랙 아담> 메인 포스터에 쓰인 ‘세상을 구할 것인가 파괴할 것인가’라는 홍보 문구가 추구하는 방향은 이질적인 팀에 속해 있었던 캐릭터들, 즉 인간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쪽과 인간의 고통에 상대적으로 공감하지 못해서 직업 윤리관이 상반된 히어로들을 한데 모으기 위한 전략적 차원의 방향 모색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블랙 아담’은 빌런 내지는 안타고니스트의 성격을 지닌 캐릭터가 아니었단 말인가. 사실 이에 대한 대답은 지금 밝힐 수 없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무엇보다 DCEU의 다음 영화 소재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블랙 아담이 안타고니스트일 수는 있어도 결코 빌런은 아니라는 점이다. 빌런을 안타고니스트의 자리에 배치하곤 했던 여타의 슈퍼히어로 영화들과 달리 <블랙 아담>은 블랙 아담을 다소 혼란스러운 위치에 배치한다.

기원전 2600년경 아프리카에 위치한 고대 도시 칸다크의 폭군 아크 톤 왕(마르완 켄자리)이 악마 사박을 소환해서 절대적인 힘을 지닌 왕관을 만든다. 이에 반기를 든 노예 출신 소년이 사람들을 선동하고 나선다. 마법사 의회는 사박의 소환을 저지하기 위해 인간사에 개입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소년에게 샤잠의 힘을 전수한다. 결과적으로 ‘블랙 아담’은 이 때문에 큰 트라우마에 사로잡힌다. 슈퍼맨과 배트맨이 ‘엄마’와 관련된 기억, 트라우마에 시달려야 했던 것과 달리 블랙 아담의 트라우마는 아빠와 아들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블랙 아담이 인터갱이라는 현대의 독재 권력을 인식하게 되는 것도 그를 유사 아버지처럼 대하는 소년 아몬(보디 사봉귀) 덕분이다.

느닷없이 등장한 저스티스 소사이어티 멤버들은 <블랙 아담>에서 어떤 역할과 기능을 하는가. 존재감도 없고 이름도 헷갈리고 능력치가 뭐였는지도 혼란스러운 호크맨, 사이클론, 아톰 스매셔, 닥터 페이트가 등장하지만 이들은 아만다 윌러를 부각시키기 위한 도구로 전락했을 뿐, 사박을 저지하는 데에도 블랙 아담에게도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아만다 윌러가 사박의 소환을 저지하는 블랙 아담을 ‘길들이기 위해’ 저스티스 소사이어티 멤버들을 투입시킨 이유는 명확하게 드러나진 않는다. 블랙 아담의 힘이 슈퍼맨의 그것과 맞먹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팀을 내보냈어야 한다는 건 코믹스의 설정을 알고 있는 팬이 아니라면 인지하기 어렵다. 결과적으로 아만다 윌러는 블랙 아담에게 고대 도시 칸다크의 지역 경찰 역할만을 부여하지만 추후 블랙 아담은 DCEU 전체에 등장하거나 영향을 끼칠 캐릭터가 될 것은 분명하다.(엔딩 크레디트 이후의 쿠키 영상에 담긴 내용이 이에 해당한다.) 아만다 윌러가 수족처럼 부리게 될 마음의 상처를 지닌 히어로가 한 명 더 늘어났을 뿐, ‘블랙 아담’은 빌런의 위치에 선 캐릭터는 아니고 안타고니스트로서의 기능 역시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영화 <블랙 아담>의 이야기 스케일이 작게 느껴지고, 등장하는 캐릭터 관계는 혼란스럽고, 이 캐릭터의 미래가 불투명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진화하는 빌런과 지쳐가는 슈퍼히어로

이쯤 되니 마블과 DC를 막론하고 혼돈의 시대를 돌파하고 있는 슈퍼히어로들의 정신 건강은 대체 누가 챙기고 있는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왜 이런 쓸데없는 걱정을 하게 되었는가 하면, 세상을 구할 유일한 존재라 여겼던 이들이 그동안 무엇을 보상 받았는가를 고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슈퍼히어로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자신이 지닌 힘을 깨닫게 된 이후에 결국 자신이 이 세계 안에서 유일무이한 존재가 아니란 사실을 깨닫는다. 거의 모든 현대의 슈퍼히어로 영화들이 같은 결말을 지니고 있다. 슈퍼맨과 배트맨이 지난 몇 년 동안 박 터지게 싸워서 얻은 결론도 그것이다. MCU에 속한 모든 히어로들이 아이언맨이라는 큰 별을 잃고 흡사 외상후 스트레스장애에 가까운 스트레스를 호소하며 활약을 이어나가고 있는 모습에서 보여주는 메시지도 그러하다.(대표적인 캐릭터가 피터 파커다.) 히어로들은 이제 한데 모일 때 시너지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덕분에 앞으로 등장하는 영화 속 빌런들의 존재감과 파워는 더욱 거대해질 것이다. 


<블랙 팬서와칸다 포에버> 어떨까

2022년이 지나기 전에 한국 극장가를 찾을 슈퍼히어로 영화로는 11월 9일 개봉하는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가 있다.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후의 모든 MCU 영화들이 그렇듯, 와칸다 왕국에 속해 있는 모두가 엄청난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채 이야기가 시작될 것이다. 블랙 팬서 역을 맡았던 배우 채드윅 보스만이 2020년 8월 28일 세상을 떠나면서 마블의 향후 전략이 수정되었고 이는 자연스럽게 이야기에도 영향을 끼쳤다.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는 와칸다의 왕이자 블랙 팬서인 트찰라의 장례식 혹은 추도식으로 이야기가 시작될 모양이다. 공개된 예고편에 따르면, 블랙 팬서의 부재로 인해 와칸다에 크나큰 위기가 찾아오는 듯하다.

MCU 세계 안에서 가장 중요한 광물인 비브라늄은 와칸다에서만 찾을 수 있는 물질인데 아마도 이를 원하는 세력들이 우후죽순 등장하게 되고 이는 중요한 갈등 요인이 될 것 같다. 와칸다의 수많은 부족들은 블랙 팬서의 부재로 인해 한데 모이지 못하고 이는 정치적 와해로 이어지거나 혹은 외부의 공격으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이번 영화에서 와칸다에 큰 반감을 표하는 인물로 추정되는 캐릭터로는 탈로칸 왕국의 수장 네이머(테노크 휴에타)가 있다. 전편에 등장했던 트찰라의 동생 슈리(레티티아 라이트)가 2대 블랙 팬서의 자리를 물려받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역할은 알 수 없지만 새로운 등장인물로 리리 윌리엄스(도미니크 손)도 캐스팅 리스트에 속해 있는데 많은 팬들은 그가 천재 공학도라서 아이언맨 슈트에 버금가는 슈트를 입고 등장하는 아이언하트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아직은 모든 게 ‘뇌피셜’ 추측에 불과하지만,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의 이야기 전체는 어쩌면 트찰라의 부재라는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와칸다인들의 분투기가 될지 모른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 예고편이 최초 공개된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는 MCU 페이즈 5의 시작점이 될 영화로서 향후 MCU의 새로운 빌런이 될 정복자 캉(조너선 메이저스)의 존재를 포스터 전면에 내세운다. 새로운 빌런을 성공시키는 영화가 곧 슈퍼히어로 영화계를 평정할 것이라 예견하는 듯하다. 앞으로 슈퍼히어로 영화는 어디로 향하게 될까. 부모에 의해, 타노스에 의해, 세상을 떠난 히어로의 부재로 인해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현재의 수퍼히어로들은 더욱 거대한 힘을 자랑하는 빌런들과 맞서게 될 것이다. 앞으로도 빌런과 안타고니스트의 밸런스를 제대로 유지하는 것이 슈퍼히어로 영화의 가장 중요한 성공 요인이 될 것이다. 우주의 평화, 나아가 이제는 멀티버스의 평화까지 챙겨야 하는 시대가 되고 말았으니, 세상의 모든 슈퍼히어로들에게 건투를 빈다. 


글. 김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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