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에 가면 뭐가 있는데
“What was your favorite place to travel in the US?” 누가 물었다. 아, 내가 영어를 잘해서는 아니고, 어쩌다 외국인과 동석을 하게 되었는데 워낙 할 말이 없어서 띄엄띄엄 “I go to the trip America last year.”이라고 했더니 돌아온 질문이다. 물론 작년에 미국 여행을 다녀왔다, 라고 콩글리쉬로 말한 나의 ‘영어’는 문법부터 단어까지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다. 무엇보다 작년에 갔으니 go가 아니라 went를 써야 한다. 하지만 내가 영어 무식자라는 것을 알고 있는 상대방은 나의 뭉개진 시루떡 같은 말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저렇게 되물었던 것이다. 미국에서 가장 좋았던 곳이 어디야? 라고. 맙소사, 내 머릿속은 암전이라도 된듯 새까매졌다.
누군가 여행을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좋아한다”라고 말해왔지만, 지난해 10월에 미국 여행을 다녀오고는 스스로에게 반문하게 되었다.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게 맞나? 인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외지에서의 기억이 하얗게 사라져버리는 사람에게, 비싼 돈 주고 가는 해외여행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하고 말이다. 지금 시대에 해외여행은 시간 대비 비용이 가장 많이 드는 여가 생활이다. 제아무리 물과 공기만 마시며 가난한 여행을 한다 해도 비행기와 숙소 값을 지불하는 순간부터 모든 것이 ‘집에 있었으면 안 들 돈’이 되어버린다. 물론 진짜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계산 따위도 하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 떠나는 순간부터 얻는 그 경험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지,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 얻는 행복으로 여행 외의 삶을 버티는 사람이라면 ‘여행은 돈 많이 드는 취미 생활’이라는 생각 자체를 안 할 것이다.
큰맘 먹고 어딜 모시고 가도 행복해하지 않고, “어머, 여긴 뭐가 이렇게 비싸냐. 집에서 밥 먹으면 이 돈 안 쓰잖냐.”라고, 우리 엄마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이다. 그런 사람들은 ‘여행을 안 좋아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로 말할 것 같으면 5일 이상의 휴가를 낼 수만 있다면 다급하게 비행기 표부터 알아보는 그런 인간이었단 말이다. 3년여간의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해외여행을 못 하다 보니 여행이라는 행위가 주는 피로감이 커진 것일까.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전날까지도 ‘아, 이 여행을 꼭 가야 하나. 너무 귀찮다.’라고 생각하는 스스로에게 가장 놀란 것은 나 자신이었다. 무엇보다, 미국은… 물가가 너무 비쌌다!
내가 미국 여행을 떠났던 지난해 9월 말을 떠올려보자. 기억이 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때는 달러 환율이 사상 최고로 치솟고 있을 때였다. 1달러가 1350원일 때부터 주변 사람들은 “너 미국 간다며, 얼른 환전해. 지금 환율 장난 아니야.”라고 독촉했다. 그때마다 나는 “아니야, 왠지 앞으로 떨어질 것 같아.”라며 환전을 미루고 있었다. 지금부터 이 여행기의 대부분이 이런 속 터지는 행동의 연속일 텐데 ‘이 인간 뭐야? 그 돈 주고 미국 왜 간 거야?’라며 같이 속 터지고 싶지 않은 분이라면 이쯤에서 이 글에서 중도 하차하셔도 괜찮다. 그렇게 환전을 미루다 보니 매일 아침 환율은 10원씩 올라갔다. 사실, 환전을 할 만큼 현금도 마련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니 미국 여행을 ‘돈도 없는데 무리해서’ 가는 형국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안 가면 되지 않나? “조금 싼 비행기 표가 나왔는데 미국 갈까?”라고 나의 여행 메이트가 물어본 몇 달 전에 그 결정을 했어야 했다. “어머, 좋아 신나.”라며 엉덩이 들썩거리는 이모티콘을 잔뜩 보낸 주제에 나는 여행이 닥쳐오자 ‘돈도 없는데 미국이라니.’ 하면서 몇 달 전 비행기 표를 결제한 나 자신을 후려치고 싶은 상태가 되었다. 그리하여 출국 당일까지 환전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매일같이 환율이 오르고 있었고, ‘어제 했으면 이거보단 쌌을 텐데…’라는 생각을 매일 하다 보니 이도 저도 못하게 된 것이다. 기대하시라. 그리하여 출국 당일 인천공항에서 부랴부랴 환전을 하고야 말았는데! 미국행 비행기를 탔던 늦가을의 어느 날, 1달러 환율은 1470원이었다. 100만 원을 환전했더니 69달러가 되는 매직! 뭐지, 내 30만 원 누가 가져갔어. 비행기를 타기도 전부터 도둑맞은 심경으로 나는 ‘이 여행 괜찮을까’를 되뇌어야 했다.
짐 싸는데 벌써 귀찮은
아, 그래서 미국 어디를 갔느냐고? 맞다. 미국은 아주 넓다. 그냥 아메리카라고만 하면 그게 동부인지 서부인지, 뉴욕인지 워싱턴인지 알 도리가 없다. 경유 시간 빼고 꼬박 열두 시간을 비행해 내가 도착한 곳은 미국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이었다. 샌프란시스코를 경유해 LA로 들어가 LA에 3박 4일,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국내 비행기를 타고 이동해 2박 3일, 여기서 기차와 버스를 타고 요세미티 국립공원에서 1박 2일, 여기서 다시 LA로 가서 하루를 묵은 후 한국행 비행기를 타는 것이 우리 여행의 일정이었다. 물론 이 계획도 다 동행인이 짰고 숙소 예약 역시 그랬다. 귀찮은 일을 모두 그에게 떠밀어놓고 그저 졸졸 따라다니기만 하면 되는 여행인데도 나는 떠나기 전부터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미국 물가가 살인적이라던데, 환율이 이렇게 높은데 여행을 가야 하는 걸까. 서울의 온갖 업무와 밀린 가정사를 안 보이는 척 더러운 빨랫감처럼 쑤셔 박아놓고, 떠나는 게 맞는 걸까. 여행을 떠나기 전 설렘보다는 후회와 걱정만 하는 나에게 ‘여행 전 사전 미팅’을 주선한 동행인이 물었다. “너, 이 여행 가기 싫은 거지?”
이 친구와는 여러 번 여행을 함께 했었다. 코로나19 직전에 운 좋게 다녀온 호주 여행도 함께였고, 그 전에 발리 여행도 함께했다. 내 휴대폰 사진첩에 몇 천 장 쌓여 있는 해외여행 사진 중 최근 5년 사진에는 모두 이 친구가 찍혀 있다. 같은 잡지 업종에서 일하기에 일반 직장에 다니는 친구들보다는 좀 더 자율적으로 휴가 일정을 짤 수 있어, 우리는 아주 많은 곳을 함께 돌아다녔다. 무엇보다 ‘생활 패턴’과 느긋한 성격이 잘 맞았다. 한 사람은 지나치게 계획적, 한 사람은 즉흥적이라면 그 여행의 결말은 파탄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둘 다 지나치게 느긋하고 즉흥적이었다. 덕분에 계획도 잘 세우지 않고, 일단 떠난 후에 그곳에서 끌리는 곳에 들어가 식사를 하고 구경을 했다. 두 사람 다 피처 에디터로 오래 일한 덕분에 외관만 봐도 그런 촉이 잘 맞는 편이었다. 늦잠을 자서 일과 중 반절이 날아가도 서로를 탓하지 않았다. ‘다시 여기 안 올 것도 아니고, 여행까지 와서 촉박하게 돌아다니지 말자.’가 우리의 여행 모토였다. 서로에게 스트레스 주지 않고, 독촉도 하지 않으며 무계획으로 돌아다니다 즉흥적으로 만난 공간에서 탄성을 지르며 ‘우와, 귀엽다. 맛있다.’를 연발했던 우리의 여행은 대개가 성공적이었다. 둘 다 어디 가서 무계획적인 걸로는 빠지지 않는데, 내가 더 무계획이었던 터라 비행기 표나 숙소 예약은 주로 이 친구가 했다. 그 부분에 있어서도 ‘내가 더 무엇을 했는데, 이건 니가 해.’라고 계산하지 않는 것이 이 친구의 미덕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관광지가 집결되어 있어 택시 타고 스폿과 스폿을 이동만 하면 되는 발리가 아니었고, 치안이 안전해 길에서 강도 만날 일이 드문 호주도 아니었다. 유튜브에서 LA만 검색해도 현지인들의 겁주는 영상이 나열되었다. 제목들이 죄다 이랬다. “미국 서부 여행 안전하게 여행하려면 이건 꼭 알아두세요!” “LA 여행 지금 꼭 와야 한다면?” 내용을 대충 살펴보면 지금 미국 서부는 마약 중독자 수와 함께 범죄율이 급상승해 길에 차를 그냥 세워두면 유리창을 깨고 블랙박스까지 털어가는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선정적인 제목과 내용으로 조회 수를 유도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최근 미국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의 전언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쨌든 예전보다 위험한 상황이니 준비를 많이 하고 가라는 것. 한 블로거는 고대하던 미국 여행을 위해 1년 전부터 여행 루트를 짜고 준비를 했다는데. 이걸 어쩌나, 친구와 나는 떠나기 2주일 전 숙소 예약을 겨우 마쳤다.
“난 LA에 가고 싶어. 넌 샌프란시스코에 가고 싶다고 했지? 그럼 샌프란시스코에서 어딜 가보고 싶어?” 친구가 계획을 좀 세우자며 물었다. ‘아, 내가 왜 샌프란시스코에 가고 싶어 했지?’ 나는 그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 주의: 여행기인데 아직 출국도 안 함.
글과 사진. 김송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