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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Apr 04. 2023

끝나지 않는 이야기

얼마 전 ‘밀리의 서재’에서 위화의 장편소설 <원청> 요약본을 낭독했다. 이 책의 표지에 있는 문구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끝도 끝나지 않은 이야기.” 그러나 문장 속이 아닌 실제 세상에서는 모든 게 끝나고 만다. 나도 언젠가는 성우로서 은퇴라는 단어와 막다른 골목에서 마주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구상의 모든 인간이 그렇듯 100%의 확률로 죽을 것이다. 끝나지 않는 것은 없다. 일전에 이 지면을 통해 <언어의 정원> 녹음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아주 느리게 진행되는 이별에 대해 언급했었다. 그러나 사실 많은 이별이 갑작스럽게 닥치곤 한다. 이별은 본질적으로 ‘갑자기’라는 단어와 어울린다. 레드와인은 육지 고기와, 화이트와인은 생선과 더 잘 어울리고, 박상민 아저씨는 선글라스가 잘 어울리는 것처럼 이별은 느린 옷보다 ‘갑자기 옷’이 훨씬 잘 어울린다. 

그것은 우리의 시작이 갑작스러웠던 데에 원인이 있을지 모른다. 우리 모두가 부모가 되지는 않지만, 우리는 모두 한때 아기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부모가 아무리 계획적으로 출산을 하더라도 아기 입장에서는 갑작스러울 수밖에 없다. 신생아실에 쪼르르 누워 있는 아기들이 만약 텔레파시로 수다를 떨 수 있다면 아마 이런 이야기를 나누지 않을까? 

“너는 누구야?” 

“그러는 너는?” 

“그러게 나는 누구지? 갑자기 눈을 떠보니 여기야.” 

“너도? 헐, 나도 갑자기 태어났는데?” 

“우리는 모두! 갑자기! 이런 봉변을 당했구나!?”

“(모두 함께) 으아아아앙!!!”

출처: Unsplash

그래서 차마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부분들은 생략되고, 끝부분의 ‘으아앙’만 우리 귀에 전해지는지도.

2020년 3월에 여기에 나의 글이 연재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그해의 이맘때, 이전에 내가 작업했던 어떤 작품의 인터뷰를 담당했던 기자님께서 별안간 본인이 편집장을 맡게 된 잡지에 글을 연재해보지 않겠냐며 연락을 주셨다. 첫아기의 탄생을 앞두고 있던 시점이었다. 당시 나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아빠가 되면 그 노릇을 잘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아기 탄생뿐만 아니라 성우로 일한 지 10년이 되는 시점도 앞두고 있었으므로, 이제 성우 심규혁에게 끼어 있던 거품이 다 빠지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도 있었다. 겸손을 떠는 게 아니라, 나는 항상 최악을 생각해보는 인간이라서 그렇다. 진짜 가장 큰 걱정은 이제 나의 시간과 꿈은 끝이 아닐까 하는 것. 아마 부모가 되길 꺼리는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부모가 되는 순간 한 인간으로서의 ‘나’는 사라지고, 누구 엄마, 누구 아빠로만 존재하게 되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 그래서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한 달 동안 블로그에 매일 한 편씩 짤막한 단상 글을 올리는 시도를 했다가 하마터면 글쓰기 자체를 증오하게 될 뻔하기도 했고, 유명무실하게 운영되고 있던 유튜브 채널에 일주일에 한 번씩 되는 대로 영상을 만들어 올려보기도 하고 라이브 방송을 켜보기도 했다. 그러다 내가 나의 존재감 상실을 막기 위해 그나마 꾸준히 할 수 있는 게 에세이 쓰기뿐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온라인 클래스 수업을 신청했다. 연재 기획서 초안을 만드는 것이 그 수업의 첫 과제였다. 편집장님의 연락을 받은 것은 그 수업이 끝난 직후였고, 나는 과제로 만들어놓은 기획서 초안을 그대로 보냈다. 그렇게 시작됐다. 아니, 태어났다. 갑자기.


우리가 자라지 않는 순간은 없다

존재감. 어떻게 보면 그냥 생명을 잃는 것보다 살아 있는 채로 존재감이 사라지는 게 더 무서운 일이 아닐까. 성우라는 직업 안에서 볼 때 아기와 만나기 직전과 비할 바 없이 더 큰 두려움을 마주했던 시기가 있었다. 2년의 전속 성우 생활을 마치고 갓 프리랜서가 되었던 2013년. 내가 공채시험을 통과한 방송사는 대원방송이었다. 지금은 성우 지망생들이 가장 들어가고 싶어 하는 방송사로 꼽힌다는데 당시만 해도 자체적으로 성우를 선발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라, 합격하고 나서도 이런 말을 종종 들었다. “지금이라도 사표 쓰고 나와서 다른 방송국 시험 다시 봐.” 프리랜서가 될 즈음에는 “밖에서 너희들을 누가 써주겠어?”라는 악담과 “너희들은 곧 모두 사라질 것”이라는 예언, 아니 장담도 들은 적이 있다. 성우라는 직업 자체가 일정 기간 전속 생활 후 반강제 프리랜서 방출이라는 특이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불안에, 그런 악담과 장담이 더해지니 불안과 두려움은 꼭 내가 몰고 다니는 먹구름 같았다. 그때에도 나는 몸부림을 쳤었다. 사라지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었지, 이름을 날리고 잘되기 위해 행하는 그런 고상한 연습이 아니었다. 

자취방에서 홀로 녹음실 놀이를 했다. PC에 USB 마이크를 연결해놓고 녹음실장 역할과 성우 역할을 동시에 하는 거다. 

“심규혁 성우님 안녕하세요?”

“아이고, 실장님 안녕하세요?”

“오늘은 이 부분을 좀 읽어주세요.”

“아, 네. 어떤 톤으로 해볼까요?”

월요일마다 방송국 앞에 있는 농협에서 14만 원씩을 찾아서 일주일을 살던 시기였다. 한 끼를 8,000원으로 계산을 하고 아침은 보통 거르니까 점심, 저녁 두 차례의 식비 16,000원에 커피값 4,000원, 그렇게 하루 2만 원에 7을 곱한 금액. 5만 원짜리 지폐 한 장과 1만 원짜리 지폐 아홉 장을 뽑아 7일을 보냈다. 어쩌다 선배가 밥을 사주거나 바빠서 밥을 거르면, 그리고 커피가 잘 참아지면, 토요일에 지폐가 꽤 많이 남기도 했다. 그럴 때는 여자 친구와 중국집에서 탕수육을 먹을 수 있었다. 데이트는 거의 카페에서. 한번 자리에 앉으면 거기서 겨울잠을 잘 기세로 붙박였다. 그렇게 마주 앉아서 책을 읽거나 무언가를 썼다. 그렇다. 돈을 안 쓰려고 글을 썼다. 쓸 말이 없을 때에는 책을 읽고 거기에 표시한 부분이 쌓이면 옮겨 썼다. 옮겨 쓰는 게 지칠 때에는 다시 하고 싶은 말을 썼다. 카페에 죽칠 돈도 없을 때에는 도서관에 가서 똑같이 놀았다. 국립도서관, 시립도서관, 주민센터 도서관, 심지어 네이버 도서관까지 가리지 않았다. 일이 없는 날과 주말, 주일은 그렇게 채워졌다. 글이라 부르기 민망한 메모와 일기 등에 불과했지만 돈을 안 쓰는 데에는 확실한 효과가 있었다. 나는 뭘 쓰고 있으면 풍족함을 느끼는 인간이다. 그래서 그런 생활이 고단하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손으로 무엇을 쓴다는 행위 자체가 나를 안정시킨다. 내가 펜으로 노트를 사각사각 긁으면, 노트는 보이지 않는 촉수를 뻗어 내 등을 긁어준다. 그래서 그런 하루하루가 답답한 적이 없었다.

출처: Unsplash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냐면… 이제 이 페이지에서 떠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쓰는 것을 그렇게나 좋아하니까 다른 곳에서, 이를테면 블로그라든가 카페라든가 어느 다른 지면에서라도 나의 흔적을 남기게 될 테고, 그것을 발견하게 되면 반갑게 인사해 달라는 이야기다. 또한 그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 덕분에 아빠가 되고 성우로 10년이나 넘게 살고도 아직 꿈을 끝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라고 독자분들께 직접 말하고 싶었다.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분명 반가울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한 명도 빠짐없이 한때 아기였던 사람들이니까. 끝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도 자라고 있다. 잘하고 있다. 


글. 심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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