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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Dec 18. 2019

[스페셜] 1. 우리의 이름, 김지영

다시, 지금 왜 <82년생 김지영> 인가



1982년에 태어난 여성들의 이름 중 가장 많은 이름, 지영. 그들은 우리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기도 하고, 82년이전과 이후를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이기도 하다. 많은 여성들이 숱한 성차별과 성폭력 피해 속에서 오늘을 살아내고 있지만, 한편 또 많은 여성들이 그것을 이유로 지금도 우리 곁을 떠나간다. 지영의 시간은 앞으로 어디로, 어떻게 흐를까. <82년생 김지영>과 함께 살아가는, 수많은 ‘김지영’들의 시간들을 모았다. 나와 엄마의 이야기, 김지영의 이야기를 발견해낸 사람들, 여성이 겪는 직장 내 성차별, 노키즈존이 익숙한 곳에서 살아가며 육아하는 여성들, 일상 속 성폭력, 그리고 김지영을 이해하려는 남성들의 노력까지. 자신의 경험을 말하기도 전, “요즘 세상에 성차별이 어딨어?”라는 단언에 삼켰던 삶의 조각들. 차라리 거짓말이라고 믿고 싶은 그 이야기들을 이제 들여다볼 시간이다.





거짓말 같은 이야기

이것은 실존하는 이야기다

글 황소연 일러스트 요니



김지영의 생일을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순식간에 내가 태어난 날로 시간은 되돌아갔다. 공교롭게도 4월 1일에 태어난 나를 두고, 내가 여자아이라는 소식을 들은 아빠는 ‘오늘 만우절인거 다 알아. 남자애지?’라고 말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재밌는 에피소드, 그 이상으로 느껴진다. <82년생 김지영>의 김지영도 생일이 4월 1일이다. 조남주 작가는 남성과 여성, 누가 보든 김지영의 삶은 ‘거짓말 같겠다’ 싶어서 그의 생일을 만우절로 정했다고 한다. 


남자아이끼리 짝이 되는 것이 담임 선생님의 고민이던 때였다. 막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뒷줄에 모여 앉은 남자아이들을 장난스럽게 바라보았다. 1990년은 여아와 남아의 출생성비가 극심했던 시기였다. 60년 만에 한 번 오는 백말띠 여자아이라고 했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백말띠 여자는 팔자가 세다.’는 조롱은 내 운명을 의심하게 했다. 아니나 다를까, 나의 할아버지가 지어둔 ‘남자 같은’ 이름은 엄마의 강력한 반대로 겨우 ‘여자 같은’ 이름으로 붙여졌다. 아주 오랜 뒤에야, 여자아이와 짝을 이루지 못한 남자아이들이 가득한 교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다. 할아버지가 점찍어둔 이름이 의미하는 바도 추측할 수 있었다.





<82년생 김지영> 책과 영화 속 장면들은 금세 한국 사회에서 논란거리가 되었다. 이미 영화 개봉 전부터 조남주 작가의 예상대로, 이 이야기는 “현실과 다르다”, “과장 되었다”는 비난을 받았다. 포털사이트 영화 탭에서는 ‘평점 테러’가 이어졌다. 영화 개봉 전부터 이 이야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 의해 3점대의 평점이 매겨진 것이다. 그럼에도 소설은 100만 부 이상이 팔렸고, 350만 명 이상의 관객들이 영화를 보았다. 민음사에 따르면 영화 개봉 직후 소설 판매량은 전 주와 대비해 열 배 정도 상승했다고 한다. 현재 소설은 17개국에 수출되기도 했다. 이 ‘거짓말투성이’ 이야기를 읽었음을 인증하거나 영화 출연을 결정한 여성들에게도 비난이 쏟아졌다. 그럼에도 더 많은 여성들은 김지영의 이야기 속으로 달려가고 있다.


마치 거짓말 같은, 원작과 영화에 등장하는 장면들의 ‘사실성’은 수치가 뒷받침하고 있다. 대한민국 여성 5명 중

1명이 성추행과 강간미수, 강간 등 신체적인 성폭력 피해를 경험하고, 절반 이상의 여성은 불법촬영, 스토킹, 성희롱 등의 피해를 입으면서 살아간다. 52%의 여성들이 영화 속 김지영처럼 성희롱을 당한 뒤 ‘자리를 옮기거나 뛰어서 도망’친다.(2016년도 전국 성폭력 실태조사, 여성가족부) 15~54살 기혼여성 가운데 결혼, 임신·출산 등을 이유로 직장을 관둔 경력단절 여성은 2018년 약 185만 명이다. (2018년도 상반기 지역별고용조사(부가항목) 경력단절 여성 현황, 통계청) 어렵게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쉽지 않다. 한국의 성별 임금 격차는 OECD 가입국 중 가장 큰 수준이다. (2016년도 남녀 임금 격차 조사, OECD) 남성 대비 여성의 임금 비율은 66.6%에 그 치고 있다. (2018년도 남성 대비 여성 임금 현황, 여성가족부) 영화 속 김지영은 “내가 나가서 벌어도 남편만큼 벌지도 못한다.”고 자조한다.


영화 속에서 많은 장면이 할애된 가사노동은 그간 사회 에서 투명하기만 했던 ‘여성들의 시간’의 윤곽을 상징적 으로 드러내는 듯하다. 한국에서 맞벌이 부부가 평일 가사노동에 투입하는 시간은 여성은 3시간 이상, 남성은 40분 내외다. (2018년도 전국 출산력 및 가족보건·복지 실태조사,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무의미한 반복이라고 생각했던 빨래 개기, 설거지하기, 아이 돌보기를 ‘독박’으로 하면서 엄마, 또 엄 마의 엄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느 스포츠 스타의 말처럼,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라며 인이 박힌 채 묵묵히 수행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영화를 보고 집에 오는 길, 야무진 동시에 지친 손길로 연신 빨래를 개던 김지영의 바쁜 움직임을 떠올렸다. 이렇게 오랫동안 가사 노동을 바라본 적이 있던가. 집 밖에서라면 김지영은 어떻게 움직였을까. 어디에 가고 싶었을까. 누구를 만났을까. 그런 상상은 우리를 어느새 내 옆의 ‘김지영’의 삶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미숙아, 너 하고픈 거 해.”


<82년생 김지영>은 이 땅의 여성들에게 놀랍지 않다. 오히려 덤덤해서 무섭다. 누구에게든 “김지영이 성희롱 을 당한대.”, “불법촬영의 위험에 놓인대.”, “아이를 낳고 경력이 끊겨버린대.”라는 이야기를 한들, ‘세상에 이런 일 이….’로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이다. 이 작품은 스포일러 가 불가능하다. 이미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든 알고 있는 이야기라서.


누군가의 말처럼 이 이야기가 거짓이라면, 완벽한 허구라면 누구보다 기뻐할 사람들은 여성들일 것이다. 우리 는 이제 남자아이가 아니라는 이유로 다른 형제를 뒷바라지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원한다 면 임신과 출산, 육아로 일을 그만두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영화 속의 지영뿐만 아니라 미숙에게도, “너 하고픈 거 해.”라고 말해주고 싶어서다. 언젠가 이 이야기들이 거짓말인 세상이 올 것을 기대하면서, 김지영은 살아가고 있다.


위 글은 빅이슈 12월호 216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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